강렬함. <하우스프라우>를 덮고 난 기분이다. 단어의 의미는 뭘까? 안나가 대체로 그리워하진 않았지만 그녀가 잘 사용할 수 있는 영어나 파국으로 치닫는 그 순간까지 소외를 느끼게 만들던 독일어, 아니 슈비처뒤치 역시 '가정주부'라는 뜻이다. 가정주부. 유부녀. 결국 안나의 소외와 우울을 극대화하기 위한 역설적 제목일지도.
"삶은 상실이다. 잦은, 일상적인 상실. 상실 또한 일정한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오직 암기함으로써만 살아남을 수 있다." p255
"인간은 똑똑히 알면서도 여전히 끔찍한 선택을 할 수 있어요. 인식에는 자동적으로 윤리가 따라오진 않죠." p259
책을 읽으며 줄곧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 단어가 맴돈다. 하지만 떨어져 나오지 않고 답답함을 키운다. 결국 딱 집어 표현할 수 없는 기분에 끝까지 휩싸여야 했다. 안나의 우울은 깊고도 끈적거려서 넘어가는 책장을 더디게 만들었다. 정말 뻔하고, 부인할 수 없고, 서툴렀고 슬픈 이방인 안나의 소외에 대한 이야기. 깊은 상실에 대한 이야기.
삶은 무엇으로 정의할까? 미국 태생의 안나는 9년째 여전히 스위스에 살지만 이방인이다. 그리고 그녀는 살아있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자신을 숨긴 채 받는 정신과 상담, 더욱 철저히 이방인들 틈에 섞이게 되는 슈비처뒤치 수업 그리고 그 어떤 의미도 없는 간통을 한다. 대체로 열심히. 그리고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대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을 주고받는다.
수치심과 죄책감 사이에는 차이가 있나요?
필요와 바람의 차이는 뭐죠?
이것이 없으면 살 수 없겠다 싶은 게 뭐야?
수동성과 중립성의 차이는 뭐죠?
고통의 목적이 뭐죠?
자아와 영혼의 차이는 뭐죠?
운명과 숙명 사이에 차이가 있나요?
사랑과 욕정의 차이는 뭔가요?
망상과 환각의 차이는 뭐죠?
집착과 강박의 차이는 뭐죠?
만약에 말이죠. 안나가 그렇게 비참하다면, 왜 떠나지 않죠?
안나, 스티븐이 누구죠?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어떤 형태로의 사랑이었다. 모든 형태의 사랑이었다." p394
"섹스가 명료함을 낳았다." p158
대체적으로 좋은 주부였던 안나는 좀 더 사랑스러운 관심이 필요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대체로 좋은 남편이었지만 안나의 소외를 지켜주지 못했던 남편 브루노와는 달리 이방인으로 섞이지 못하는 삶에서 같은 언어를 쓰는 애정 어린 남자 스티븐을 만나면서 안나는 살아 있음을, 삶의 의미를 찾으려 애쓴다. 그건 안나에게는 사랑이 아니었지만 사랑이기도 했다.
'간통'이라는 '불륜'이라는 자극적인 주제를 다루지만 원색적이지 않다. 어쩌면 안나가 그녀의 삶에서든 가족의 삶에서든 섞이지 못하고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고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를 보며 동정심을 자극해 '간통'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게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극도의 소외를 맞이한 한 여자가 자신을 찾기 위해,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내면의 고통을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안나의 깊은 우울은 전염성이 있다.
"하지만 타오른 다음에 오는 단계는 세척이죠. 솔루티오. 석화된 요소를 물로 씻어 버리는 것이에요. 가령, 눈물처럼."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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