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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데로서평

문학/소설] 내가 너를 구할 수 있을까

by 두목의진심 2016.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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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에게"라고 글을 시작해야 할 것 같이 정성스러운 편지와 책을 받았다. 사실 여기저기 꽤나 많은 곳에 서평단으로 신청하고 가끔씩 선정되어 글을 남기긴 하지만 대부분 출간된 책이고 시일에 쫓기듯 읽고 감상을 서둘러 정리하기도 한다. 한데 이번 책은 '가제본'이다. 첫눈이 내린 아침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랄까. 책을 다 읽은 오늘, 마침 오늘은 제법 눈이 많이 내렸다.

 

얼마 전에 <내가 너를 구할 수 있을까>라는 책을 받았다. 580쪽이 넘는 두껍기 그지없는. 난 원래 두꺼운 책은 피하는 편인데 너무 두꺼우면 읽기도 전에 멀미가 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다 읽을 수 있을까 싶어서. 하지만 이 책은 왠지 느낌이 좋다. 편지에 적힌 것처럼 내가 첫 독자일지 모른다는 생각과 아직 제대로 옷을 갖춰 입지 않은 채 세상에 나온 '가제본'의 모습이 꽤나 멋지다. '루스 오제키'의 신작으로 엘리에서 펴냈고, 뭔가 신비로운 느낌의 책이다. 제목도 내용도 거기에 가제본이라는 느낌도 너무 좋다.

 

"당신은 나와 통하는 유시인 거고 우린 함께 마법을 만들어낼 거예요!"

 

"사람과 사람은 '마법'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글귀가 한참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짧지만 끌어들이는 힘이 강하다. 양자역학, 슈뢰딩거의 고양이.. 죽었지만 동시에 살아있는.. 생소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하지만 이 멀미 나는 두께가 한없이 얇을 수 있는, 거침없고 단숨에 나오와 루스의 연결의 힘을 믿게 된다.

 

16살, 유시이면서 나오라고 불리는 아이의 1인칭 시점의 일기. 하지만 또 지구 반대편에 존재하는 루스의 2인칭 시점의 이야기.. 거대 쓰나미가 일본을 휩쓸고 지나간 후 몇 년의 시간 흐르고 발견된 자살을 암시하는 일본의 한 중학생 소녀가 쓴 일기를 발견한 루스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위급한 아이라 생각하고 그 소녀의 시간으로 유입된다. 루스의 시선으로 나오의 일기를 따라 읽는 나는 자발적인지 아닌지 아직은 가늠할 수 없지만 자살을 암시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슬프지 않고 기대되 버린다. 그렇게 나오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유시(有時)란,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사람, 그러니까, 당신과 나, 그리고 지금 존재하고 예전에 존재했고 앞으로 존재할 모든 사람을 뜻한다"고 하면서 사람에 대한 궁금증,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바로 옆에 앉아 단 1초도 쉬지 않고 조잘거리는 아이처럼 일기는 이어진다. 정말 그들은 나를 인지하지 못하지만 내 눈앞에 루스가 고개를 숙이고 나오의 일기를 읽고 있으며 그 옆에 나오가 앉아 귀에 대고 소곤거리듯 끊이지 않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듯한 착각이 또다른 시선이 된다.

 

<알 라 르셰르슈 뒤 탕 페르뒤> 번역하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시간의 흐름에 의미가 있을까? 나에게 잃어버린 시간이란 어떤 의미일까? 갑작스레 전신마비가 되어 재활로 지나 버린 이십 대의 빛나는 청춘이 나에겐 그 잃어버린 시간일까? 궁금하다. 내게 그런 시간이 존재했었고, 존재하고, 존재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왠지 나 역시 루스가 그랬던 것처럼 나오에게 조금씩 닿고 있다는 생각이다.

 

찰나의 순간에, 시간의 흐름을 동네 목욕탕에서 벗은 호스티스 여자와 노인의 알몸에서 느끼는 나오의 묘한 상상력은 그녀가 늘 지독한 이지메를 당하며 '자살'을 건조하게 입에 올릴 수 있는 것과는 어떻게 이어져 있을까? 일본인이면서 미국 이민자로서 낯선 일본에서 그것도 빈곤한 삶이 암울하기만 한 나오의 일기는 시종일관 어두운 터널 안에 갇힌 듯 어둡기만 하지만 정작 그 속에 있는 나오의 시선은 건조한 공기에 곧 바스러질 것 같이 부스럭거린다.

 

어디까지 이어진 걸까? 정말 바다를 부유하며 떠다닌 정글 까마귀의 존재는 나오와 어떻게 이어진 걸까? 루스와 올리버는? 백네살의 지코 할머니는 정말 죽었지만 살아있는 것일까? 하루키 1번 역시? 야스타니 하루키 1번의 사연은 이차 세계대전에 낙엽처럼 태평양 어느 한 지점으로 떨어진, 강제로 죽음으로 내몰린 이들의 먹먹함으로 채워진다. 죽음을 앞둔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조차 자신의 말이 아니었던 그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가늠할 수 없지만 슬프고 아픈 시대였음을 그와 나오와 함께 나도 이어질 수 있을까. 그럼에도 단언컨대 하루키 1번은 전쟁영웅은 아니다!

 

"시간과 집중은 재미있는 방식으로 상호 작용한다."

 

상당히 심오하고 철학적이며 물리학적이며 어둡고 습한 느낌이 나는 책이지만 어쨌거나 독자로서 끝을 보았고 나오가 몬트리올에서 프랑스어와 문학을 공부하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야스타니 하루키 2번이 '무무'를 만들어 새로운 삶을 살고 있음을 안다는 것은 결국 <시간을 되찾은> 그들을 안도한다는 것. 루스와 올리버와 함께 나 역시 그들을 구할 수 있었음에 기분이 나아진다. 나도 마구마구 슈파파와가 생긴 듯하다. 꽤나 신비로운 책이다.

 

그리고 나중에 기회가 허락된다면 '서니 베일'이나 '웨일 타운'에 가보고 싶다. 나오가 현실적이라 했던 그 '서니 베일'과 루스가 이어졌던 '웨일 타운' 말이다. 그리고 책장을 덮은 지금 나도 나오처럼 닉 드레이크의 노래를 인터넷에서 찾아 <Time of no replay>를 듣는다.

 

 

글 : 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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