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의 '사소하다'라는 단어가 참 중의적으로 들렸다. 가벼우면서 얼마간 하찮게도 느껴지면서 한편 편안하고 친근한데 예쁘기까지 하다는 느낌이 동시에 들었다.
'지역 문화 인프라 구축 이야기'라고 쓰인 이 문장에 홀렸으리라. 결국 지역복지를 추구해야 하는 장판(장애인 복지 현장)에 몸담고 있으면서 이런 지역적 특히 문화적으로 지역으로 스며둘어 사람들과 소통의 깊이와 넓이를 만들어 가야 하는 현실에서 이런 지역 주민과 부딪히며 만들어 나가는 밀도 있는 이야기는 그냥 가볍게 넘길 수 있는 내용은 분명 아니다.
저자는 두 개의 대학에서 역사교육과 문화콘텐츠를 전공하고 지역 문화 인프라를 재구성하는 돌창고의 대표이자 총괄 디렉터로서 일한다. 이 책은 남해의 유휴공간을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느꼈던 경험을 담은 이야기다.
사실 나는 대도시가 아닌 지방의 소도시나 그와 비슷하게 인구 밀집도가 많이 헐렁한 지역으로 스미고 싶은 속내가 있다. 사람과 부대끼며 사는 삶에 지쳐하지만 또 한편으로 그렇게 헐렁한 지역에서 내가 가진 재능으로 지역에 도움이 되는 길도 꿈꾸기도 한다. 참 역설적이지 않은가.
또, 나는 귀촌을 희망하지만 청년들을 창업으로, 그것도 도시가 아닌 지방의 한산한 지역으로 내몰면서 도시 재생의 아이콘으로 만드는 정책은 아주 못마땅 하다. 청년들에게 빚을 내서 집을 사게 하고, 창업하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 인구 소멸이라는 급박한 지역적 한계를 '살려내는' 심폐 소생의 임무를 부여하는 건 아닐까.
그렇게 낙후되거나 사라져 가는 지역을 창조적이고 재기 발랄한 색채로 재생하는 것을 그럴싸하게 판타지처럼 포장해 그들 눈을 가리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 부정적 시선이 얼마간 있다.
돌창고가 만들어진 배경을 따라가다가 스튜디오 흰벽에 씌인 슬로 모션이라는 캘리그래피를 보자 심장 펌프질이 빨라졌다. 대도시의 질수 없는 빠름이 몸에 베인 탓에 느림이란 감각을 가질 수 없으니 순간 공간적 흐름은 결핍이 됐다. 애초에 처음부터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돌아 갈' 지역이 없는 것 역시 결핍이라서 고향이라는 단어는 판타지다.
낯설지 않다. 남해의 보호수를 본 적이 있던가. 1박 2일이었을까 아니면 유사한 프로그램이었을까? 수령이 그리 오래된 것도 놀라운데 엄청난 규모의 생명력과 그 푸름에 다시 한번 반한다. 그런 남해 보호수를 여행지로 소개하는 돌창고의 프로젝트를 보며 '가서 보고 만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언제고 이 서른 한 그루의 거대 생명체를 돌아 보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관광개발사업이 추진되는 남해에서는 자연 경관을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건축물이 늘어나고 그 대가로 자연이 파괴되는 모순된 흐름이 보인다. 남해에 놀러 온 관광객들을 위한 시설이 필요는 하지만 자연에 기대 건축행위만 할 것이 아니라 무형적인 섬의 매력을 개발하는 데에도 주력해야 한다." 41쪽
저자의 '자력'에 대한 자부심과 고민이 담긴 글에서 지역에 계획되는 문화 인프라는 어때야 하는가를 덩달아 조금은 고민을 흉내 내 본다. 지역으로 '돌아 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 가보려 하는 나로서는 이런 고민들이 흥미롭고 설렌다. 과연 나는 자력으로 뭘 해낼 수 있을까?
"기억은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을 통해서도 소환된다." 60쪽
마을이 재생되면서 추억도 재생된다는, 그래서 마을에서 오랜 세월 추억을 쌓은 사람들이라면 자동 재생되는 어떤 이야기들이 있기 마련임을 저자는 그의 프로젝트를 통해서 전달해 준다. 분명 의미 있고 재미에 가치까지 있는 일이다.
어차피 공간에 대한 어려운 푸코의 철학을 저자 역시 어렵게 설명하지만 지극히 환상적이면서 또 지극히 현실적인 장소로서의 공간적 이질감을 부여하는 헤테로토피아는 내게는 어쩌면 5도 2촌쯤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아직 마련되지 않은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만약 치열함을 벗어 던지고 원초적 느림을 추구할 수 있는 그런 곳이 생긴다면 말이다.
"유휴공간을 리뉴얼하여 그곳이 다시 활성화되는 것은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부심으로 이어진다. 그 자부심은 생활의 활력이 되고 그것이 모여 마을의 활력, 지역의 활력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다시, 아름다운 시절이 온다." 213쪽
결국 이 책은 남해라는 지역적 거리를 확 줄여 주었다. 돌창고의 프로젝트들, 미조의 변신이나 남해각이 궁금해지더니 남해대교를 건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분명 도시 재생은 자석처럼 사람을 끌어 당기는 그 무엇이 있다. 이 책이 그걸 증명한다. 다만 이런 프로젝트로 살아난 지역이 젠트리피케이션의 희생양으로 남질 않길 바란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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