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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데로서평

[철학/낭독리뷰]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 팬데믹을 철학적으로 사유해야 하는 이유

by 두목의진심 2021.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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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새로 노려보는 듯한, 이 시대의 손꼽히는 철학자 지젝의 눈빛이 강렬해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던 책이다.

 

팬데믹 2년 차, 사람들의 입에서 "감기 같은 거야"라는 말이 오르내린다. 정말 그런가? 방역 선진국이라는 한국의 어제(2021.7.13 기준) 확진자는 1,615명이었다. 전 세계는 셀 수도 없을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밤거리를 배회하고, 심지어 조금 거리두기가 완화된 지역을 넘나들며 술 파티를 벌인다. 이들은 공공의 적인가?

 

지젝은 서문을 통해 팬데믹의 실체를 독일 헤비메탈 그룹 람슈타인의 노래로 이야기한다. 인간에게 삶은 살아가려는 적극적인 의미이자 선택이고 그래서 살려는 의지를 잃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데 이런 살려는 적극적인 선택적 의지가 할 수 없는 것들로 그냥 살아가야만 하는, 지루하게 이어지기만 하는 삶이라면 과연 우리는 삶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를 역설적으로 그는 반문한다.

 

눈에 보이지도 않아 생명체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바이러스에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데서 오는 허탈감과 무력감은 슬쩍 자연을 향한 겸손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분한가? 여기에서 오는 피로도는? 지젝은 이렇게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변화에 철학적 사유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팬데믹의 창궐을 자본주의 폐해로 연결 짓는 이 철학자의 사유에 목울대로 계속 침을 넘기며 빠져든다. 열악한 이민 노동자의 삶이 어느 특정한 국가에 한정된 일이 아니다 보니 팬데믹이 어디서 생겨났는가가 아니라 어디서, 어떻게 양산되는가에 집중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논리가 그걸 그냥 놔둘 리도 없고 그의 지적처럼 사회 곳곳에서 마스크를 쓰냐 마냐 혹은 자유를 제한하느냐 마느냐 같은 사회적 갈등이 들끓는 이유를 생각해 보라고 등 떠미는 것 같다.

 

"팬데믹의 진짜 문제는 사회적 고립이 아니라 타인과의 사회적 연결망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다." 68쪽

 

인상적이었던 <사회적 거리두기 시대의 섹스>는 육체적 접촉을 피해야 하는 상황이 점점 성적 욕구를 줄어들게 함과 동시에 육체적 관계보다는 이미지 앞에서의 자위가 중요해지는 시대라는 점을 꼬집는다. 이는 70년을 냉동됐다가 해동된 주인공이 VR 안경을 쓴 채 섹스에 몰입하는 상대를 보며 기겁해 하는 영화 <데몰리션맨>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때 "말이 돼? 너무 심한 거 아냐?"라며 영화적 허구에 냉소를 보냈었다. 그뿐만 아니라 바로 뒤이어 나오는 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 실험과 관련된 섹스의 부차적 설명은 '과연 인간에게 섹스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정도를 넘어 '여전히 우리는 인간일 수 있는가?'에 대한 흥미로운 사유를 유발한다. 개인적으론 좀 섬뜩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곧 은하철도 999가 기계가 되고 싶은 인간을 싣고 하늘 위로 날아오를지도 모르겠다.

 

 

팬데믹 하에서 삶과 죽음의 딜레마는 "살기 위해 거리두기와 자가 격리를 하는 것은 결국 생존에 필요한 돈을 잃는 행위이므로 죽는 일이며, 죽기를 각오하고 생업으로 뛰어든다면 이 또한 감염이라는 죽음으로 내몰리는 상황을 초래한다"라는 지적은 얼마나 이 시대가 어두운지 명확해지는데, 그럼에도 밖으로 나가는 일은 그나마 생존을 단축한다는 사실은 우울해 질수밖에 없다. 그뿐만 아니라 뉴포스트 휴머니즘 시대의 현실적 선택은 가상이나 허구의 현실을 바탕으로 존재하는 상황에 대한 딜레마를 매트릭스의 알약으로 표현한 그의 통찰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따라잡기 힘들다.

 

"우리는 맨 얼굴이 아니라 마스크로 가린 얼굴에 더 많은 '인간성'이 있다는 엄중한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136쪽

 

기본적으로 그는 민주주의의 시스템, 정확히 말하면 자유주의에서의 민주주의에 꽤나 회의적임을 공공연하게 표현한다. 물론 민주주의의 체제에서 곪아 터진 시스템은 말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여기에 따르는 자본주의가 공공을 버리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벌어지는 빈부의 끔찍한 편향은 민주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어디까지 허용하는가에 대한 문제로 비약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사유를 부추긴다.

 

여하튼 팬데믹으로 우린 더 이상 맨 얼굴을 내보일 수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의 삶이 제한된다 하더라도 개인의 자유보다 모두의 생명이 중요하다는 점에 이견을 내세우는 집단이 제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의 말처럼 민주주의의 한계일 수도 아니면 종말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이 책에서 그는 14장에 걸쳐 팬데믹 하에서 일어나는 체제의 불안, 인종이나 성차별, 사회적 갈등 등을 광범위하게 다루면서 바이러스가 위협하는 인간적인 삶을 지켜내기 위한 올바른 선택이 무엇인가를 사유하게 만든다. 또한 <결론 아닌, 결론>을 통해 이 심각한 피로감을 우린 어떻게 넘겨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다. 그 어떤 소설보다 더 몰입도 높은 내용으로 채워져 순식간에 읽게 된다. 숨 막히게 멋진 책이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완독 후 솔직하게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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