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생머리, 환경, 제주도 그리고 화가. 뭐랄까 TV 화면에서 천방지축 뛰어다니며 어른에게 반말을 찍찍하면서 반색하는 어른들의 반응을 즐기는 듯한 아이를 보면서 "화가는 무슨"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몇 년 후, 깡총해진 머리와 여전히 번잡스럽긴 매한가지이면서도 뭔가 모르게 조금은 의젓해진 모습으로 다시 티브에 등장한 소년을 봤다.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선 하나에도 사람을 향한 마음이 담긴 선도 색도 생각도 선명해진 소년의 말에 말문이 막혔던, 아니 창피했다는 게 솔직하겠다. 어쨌거나 그렇게 그림 좀 그리는 천방지축 소년은 생각 깊은 작가로 기억됐다.
이 책은 제목처럼 일기다. 소년의 4년간의 역사에서 일부를 옮겼다. 그리고 일기를 왜 써야 하는지 선언처럼 여는 글로 시작한다. 훗날 자신의 잘못을 거울처럼 비춰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글로 남긴다는 이유에 입이 떡 벌어진다. 어른스럽다는 게 나이와 관계없겠지만 확실히 소년은 그렇다. 게다가 아무리 초등학교 고학년의 나이라고는 하지만 구사하는 어휘력의 수준은 나보다 훨씬 낫다.
"안 되는 일은 잠시 내버려 두고, 되는 일은 된다고 행복해하면 된다"라는 말에 허탈해졌다. 이 나이 어린 친구의 깨달음을 쉰둘이나 먹고서도 깨닫지 못한 채 무슨 일에든 불평불만을 툴툴거리는 내 모습이 어쩜 이리 창피한지 읽어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자신이 애지중지 아끼던 노트를 동생이 망가트리고, 기대에 차 1년 동안 모은 용돈을 다 날린 일로 속상하고 아픈 마음에도 되려 이렇게 "슬픈 마음을 먹으면 즐거운 마음이 그만큼 멀어졌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동생의 머리통에 꿀밤이라도 주는 게 아니라 마음을 다독이고 내려놓는 일이 이 나이 어린 소년이 어떻게 가능한지 생각하면 할수록 헛헛한 웃음만 난다.
"진정으로 내 삶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겪는 아픔도 행복일 수 있고, 견디는 극복도 행복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당장에 쾌락보다 전체적인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고,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존재들을 바라보는 시간을 더 가지자고 다짐한다." 64쪽
이 소년을 그저 동화 작가나 화가로 부르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철학자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 삶, 관계, 사랑, 휴머니즘 등 읽으면 읽을수록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에 흠뻑 빠져들었다. 이 조그만 소년이 걷잡을 수 없는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길 바라는 마음이 진심으로 느껴져 나는 마음이 무겁다.
"배운다는 것은 순서도 없고 정해진 규칙도 없다. 나를 변화시키는 순간, 그때가 내가 무언가를 배운 순간이다." 169쪽
아이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며 자란다고 하던데 이 책을 읽으며, 아이가 이렇게 깊은 생각할 수 있는 힘은 다름 아닌 지혜로운 엄마가 있었기에 가능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깜냥이 안 되는 내 그릇을 탓하는 건 아니다 싶어 이제라도 이수가 말한 순서도 규칙도 없는 배움을 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빵빵해진다.
읽는 내내 기분은 신기하기도 하고 마음은 무겁기도 했다. 이제 14살이 된 소년의 눈에는 세상은 어떨까? 아니 사람은 어떨까? 가족 안에서 끊임없이 삶에 대해 사유하는 아이의 철학이 가볍지 않아서, 글과 그림을 허투루 넘기지 못하게 한다. 글씨체도 비슷하고 짧은 글로 깨달음을 주던 광수생각이 생각났다. 잠들어 버린 사유를 깨우는 철학 책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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