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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데로서평

[교양/에세이] 사양합니다, 동네 바보형이라는 말 - 한국에서 10년째 장애 아이 엄마로 살고 있는 류승연이 겪고 나눈 이야기

by 두목의진심 2018.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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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에서 미끄러지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주문해버리고 말았다. '장애'에 대한 이야기. 그것도 당사자가 아닌 최전선에서 힘듦과 싸우고 있는 엄마의 이야기라니 읽고 싶었다. 그런데 읽으면서 참 할 말이 많아지는 책이다. 

<사양합니다, 동네 바보형이라는 말>는 장애 전반적인 정책에서부터 장애아를 키우는 어려움을 나누며 몸소 체득한 그동안의 노하우를 전달하고 있다. 솔직히 "이 엄마 아직 장애 수용이 안된 거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장애'로 본인과 가족의 행복이 산산이 부서졌다는 식의 이야기가 마음에 걸리기도 했지만 읽다 보니 꽤나 의미 있는 책이다. 


사실 복지관에 다니는 장애아 혹은 청년이 된 장애인과 함께 다니는 부모들(대부분이 엄마다)의 표정엔 늘 고단함이 짙게 묻어있다. 오죽하면 그런 부모를 쉬게 해주자는 '가족돌봄제도'가 만들어졌을까. 


"내 인생의 궤도는 180도 바뀌었다. 태어나는 순간 '에'라고밖에 숨을 쉴 수 없었던 아들은 자신의 인생뿐 아니라 엄마의 인생도, 가족의 인생도 모두 바꿔놓았다." p9, 프롤로그

이 문장이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기대와는 다르게 프롤로그를 읽으며 "고작 10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편협한 건 아닐까. 기자 출신의 잘 나가던 커리어 우먼. 한순간에 삶의 궤적이 바뀐 허탈함을 이해하고 경험하지 못한 낯섬이 일상을 메워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그 참담함도 이해한다. 

하지만 10년쯤 지났으면 아들의 장애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누구 때문에 인생이 뒤바뀐 것도 아니라는 걸 수용해야 하지 않을까. 동환이도 원해서 장애아가 된 것도 아니고 엄마도 일부러 장애아를 만든 게 아니다. 그저 그렇게 된 것뿐이다. 그걸 운명이라 해야 한다면 그렇다.

우연히 만난 장애인을 무시해서 천벌을 받은 것도 아니고 장애인을 곁눈질로 쳐다봤다고 죄책감에 빠질 필요도 없다. 장애인을 특별하게 대해야 하는 게 아니라면 다른 모습과 다른 행동에 호기심을 보이는 것 정도는 편견이라고 하지 말았으면 싶다. 그렇게 민감할 필요는 없다.

그런 것들이 비장애인이 장애인에게 갖는 편견뿐만 아니라 장애인 당사자와 그 가족이 갖는 피해 의식도 편견을 양산하는 일이 아닐까. 우린 좀 더 너그러워질 필요도 있다. 한 30년 장애 당사자로 살아보니 내가 그렇더라. 내 전동 휠체어는 아들도 아들의 친구도 올라타는 그저 장난감 정도로 이용되기도 한다.

"반 친구들도 아들을 잘 챙겨주긴 했지만 친구 관계를 형성하기보다는 돌봐줘야 할 작은 동물처럼 대했다. 체육관으로 이동할 때는 손을 잡고 함께 걸어주지만 딱지 치기나 역할놀이를 할 때는 아들을 끼워주지 않는다." p43, 내게도 친구가 생길까요?

가슴이 묵직해지는 말이다. 그리고 과연 통합학급이 좋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일반 학교에 다니는 발달장애 학생은 주요 과목이나 실험이 필요한 과목은 도움반으로 이동시킨다. 왤까? 예전 학교에 교육을 나가서 특수반 선생님께 물어봤다. 그랬더니 "주요 과목은 다른 친구들의 학습이 방해될까"였고 실험이 필요한 과목은 "위험해서" 란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장애학생에게도 학습권이 있고 이런 배제는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중 직접차별, 교육 차별에 해당한다. 장애학생이 다니고 있다면 당연히 함께 교육을 받아야 하고 필요하다면 장애 학생이 교육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이 그러질 못하니 동환이가 학교에서 친구에게 거절당한 화살이 엄마의 심장으로 파고드는 거다. 

한편으로 읽으면서 자꾸 마음 한편이 불편해지는 걸 숨길 수 없다. 지적장애를 가진 아들을 순수한 영혼을 가진 어린 왕자로 표현하면서 독자에게 "우리 아들은 지적으로는 미숙하지만 당신 아이들보다 순수해!"라고 강요하는 느낌이랄까. 굳이 그런 표현을 쓰지 않아도 전해지려면 다 전해진다. 그리고 은연중에 너무 어린아이 취급한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이 부분은 뒷부분에 가면 아들을 개별적인 인격체로 대해야 함을 깨닫는 이야기가 나와 한시름 놓았다.)

나이 들고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코코아 한 잔을 앞에 놓고 위로를 받다니. 지적장애인은 나이 들고 성인이 되어도 발달이 어리니 소주 대신 코코아를 마셔야 하는가라는 생각에 울컥했었다.

부모가 먼저 장애를 수용하고 스스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필요하다. 지적 장애인도 성인기가 되면 발달에 맞게 이성에게도 관심이 많아지고 사회적 역할에도 호기심을 보인다. 어린 왕자로 어리게만 보아서는 안된다.


"어차피 아이들은 치료실 안이 아니라 치료실 밖 사회 속에서 살아 나가야 한다." p51, 사람 노릇을 위한 수업료

복지관에서 일하다 보면 가끔 아이에게 올인하는 부모를 본다. 책에도 있듯 100만 원이면 서너 살, 200만 원이면 초등학교 3, 4학년의 지적발달로 향상시킬 수 있다. 그저 환산 금액이지만 이렇게 한다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치료에만 전력한다는 거다. 집안일도 가족도 다 팽개치고 더구나 엄마 자신을 챙기는 건 무리다. 그러다보면 당연히 가정이 무너진다. 말 그대로 파탄이다.

국가가 책임지지 않는 상황에서 엄마는 지치지만 아이가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도록 혹은 개중 특별한 능력이라도 보일라치면 아주 끝장을 보려 전력투구하는 엄마를 본다. 하지만 아이의 능력은 키워질지 몰라도 사회성이나 그 밖의 감각들은 오히려 무뎌진다.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하니 세상 속으로 나와야 한다. 그래야 비장애인들도 자신과 조금 다른 생각과 감각,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도 함께 살고 있음이 자연스러워진다. 

자식이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듯 부모도 장애 아이를 골라서 낳을 수 없다. 말하자면 그 누구도 장애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 제발 '죄'책감에 스스로를 몰아세우지 말았으면 싶다. 단언컨대 부모도 낳은 죄란 없다. 

"우리 아이는 못 갈 데를 간 것이 아니다. 의무교육을 받으러 갔고 우연히 다른 아이들과 한 반이 되었을 뿐이다. 국영수 같은 주요 과목 시간에는 특수반에 내려가 있어서 일반 이이들의 학습에도 지장을 주지 않는다." p87, "죄송합니다" 대신 "안녕하세요"

열 살 아들을 어린 왕자로 아이 취급하는 것이 걱정스러웠는데 '자식으로부터 독립할 준비되셨습니까?' 부분을 읽으며 다행히 연령에 맞는 대접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어 마음이 좀 놓였다. 

내용에도 한 부분 거론된 '장애등급제 폐지'와 관련해 아는 강사와 열띤 토론을 한 적이 있다. "사회에 기여를 하지 않는 장애인은 사람 '대접'을 하기 어렵다"는 지론을 펴던 강사에게 사회보장제도는 그런 기여나 대접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고 핏대를 올리다 이견을 좁히지 못했던 일이 생각났다. 도대체 "의미 있는 인생"이건 "사람대접을 위한 사회적 기여" 건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말이다. 

이 책은 장애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담겼다. 장애 당사자와 가족, 특히 엄마의 고단한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이라는 삶이 가지는 가슴 먹먹한 이야기가 있다. 이 책은 모두 읽어야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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