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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데로서평

[인문/철학]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 아름다운 삶을 위한 철학의 기술

by 두목의진심 2017.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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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책장을 다 넘기고도 드는 생각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는가? 다.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철학적 관념의 향유를 즐기기는 했지만 글을 읽은 것이지 스친 것이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알 수 없다. 부끄럽지만 철학은 철학으로 남긴다. 내겐 철학이 삶이 되기엔 어렵다.

 

그림 한 점으로 어떻게 이렇게 많은 관념이 펼쳐지는가. 그저 놀랍다. 에드워드 호퍼의 <철학으로의 소풍>이라는 그림을 보면 반라의 여자가 풍만한 엉덩이를 보이고 그 앞으로 고개를 떨군 남자가 앉아 있다. 그의 발끝은 넓은 창으로 들어온 빛이 깔려 있다. 저자에 따르면 빛은 남자의 우울을 조롱하는 것이라 한다. 관음적, 은밀한 타인의 삶을 들여 다 보는 기분. 그 자체로 이미 철학에 집중하기 어렵다. 저자는 <철학으로의 소풍>이라는 그림을 통해 니체, 몽테뉴, 아리스토텔레스 등 수많은 사상가들의 '실존'이라는 삶에 집중되는 관념들 습관, 쾌락, 고통, 우울, 고통, 죽음 그리고 시간 등을 통해 삶의 모순을 이야기한다. 삶을 고민하려면 죽음을 마주해야 하는 것처럼.

 

"그러나 이제 이들은 삶 자체를 피하고 더 이상 삶을 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들이 삶을 추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 추구를 우리는 기껏해야 '철학으로의 소풍'을 감행하는 사람들에게서나 발견할 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단순히 그 자리에 머물면서 공허함의 기념비 같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 있거나 서 있다.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그리고 헛되게도 태양을 향해 얼굴을 돌린다." p29

 

선택과 결정은 다르다.

주체적 삶의 기술로서의 선택. 선택은 가능성의 한 지평을 열거나 닫는 일이라는 말은 어렵지만 그럴싸하다. 일련의 제한된 구조적 상황에서 누군가의 주체적이고 현명한 선택은 분명 새로운 삶의 방향과 지평이 될 것이다. 그러면 결정은 무엇일까. 어쨌거나 이 모든 것에는 '후회'가 따른다. 그래서 무엇을 선택하고 결정하는가는 철저하게 주체적이어야 한다. 후회하지 않는 삶이 구체적인 목표겠지만 어디 삶이 후회를 벗어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질문. 결정은 무언가?

 

결국 삶은 쾌락과 고통 사이에 걸쳐 있다.

p73에서 말하는 쾌락의 부정적 이미지에 대한, 그러한 성찰적 삶의 기술에서의 쾌락 활용은 그래서 제한적이고 절제적인 쾌락은 이미 쾌락의 의미를 잃은 게 아닌가 싶지만 어쨌든 쾌락의 활용은 형상화하는 삶의 실행과 침착한 삶의 실행의 한 요소가 될 수 있다니 아리스토텔레스와 몽테뉴를 믿어볼밖에. 오호라. 쾌락과 욕망(性的 쾌락)의 차이가 그것이었다니.

 

고통과 죽음의 사유.

삶의 마지막에 맞닥뜨리는 그 무엇에 대한 실존. 그것이 죽음이라는 현상은 슬퍼할 일도 우울해할 일도 아닌 그저 실존의 한 부분이다. 어쩌면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린 열심히 사는 중간중간 죽음을 생각한다. 간혹 실행에 옮기는 사람도 있겠고. 이런 모순적 관념이 삶인가? 철학인가?

 

"시간의 가위는 시간을 잘라낸다. 그리하여 시간의 폭이 좁아지고, 현존하는 것과 미래에 존재하게 될 것들이 점점 더 가까워진다. 마침내 현재의 한 점으로 수렴되고 시간은 결정적으로 잘려나간다." p117

 

아, 적절하고도 명확한 정의가 아닌가. "현재의 시간은 잘려 나간다."라니. 현재의 시간에서 멈추어 보면 존재의 의미를 가진 시간은 없다. 눈 깜짝할 사이에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과학이 우릴 어지럽게 만들고 그것이 현재의 것인지 미래의 것인지 부분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밀려들어 휩쓸고 지난다. 이젠 현재가 미래인가라는 질문만 남는 듯하다. 결국, 철학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의 연속이고 삶 그 자체인가.

 

행복해지는 것에 대한 일종의 강박관념.

삶의 지향에 대한 총체적인 답이 아닐까 싶다. 우린 '행복한 삶'을 위해 사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야 함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저자는 부정적으로 사고하는 게 신상에 이롭다고 하고 있다. 그 이유는 긍정적 사유와 부정적 사유는 분명한 기대의 차이가 있으며, 부정적 사유는 애초에 기대가 낮다는 게 이유다. 이런 현실적인 비판이 수반되는 부정적 기대는 성과를 내면 더 많은 삶의 기쁨을 동반한다고 설명한다. 또한 긍정적 기대만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오해는 버리라고 지적한다. 기대를 낮추는 게 생명 연장의 지름길이란 거군.

 

"마음의 평정은 삶의 늦춰진 속도와 시간의 줄어든 압박에서 얻어지는 자유를 제공한다." p205

 

불확실한 멜랑꼴리는 에로티시즘 위에 얹혀 내면의 문제로 취급된다. 그래서 씁쓸하게 미소 지을 뿐이다. 참으로 자조적인 내면의 성찰이 아닐 수 없지 않은가. 지적 호기심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난 에드워드 호퍼의 <철학으로의 소풍>이란 그림 한 점으로 시작된 이 주체적이고 관능적인 삶의 철학을 깨닫거나 정리할 수 없다. 그저 활자를 따라 눈동자를 움직였을 뿐 사유하지도 더군다나 이해할 수 없었다. 철학이란, 실존이란 존재가 갖는 고단함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선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선택 가능한 것을 '행복'이라 정의했다. 그것은 결국 삶의 형식이며 타인과의 얽힘 속에 만들어지는 주체적이고도 자조적인 만족하는 삶이라고 한다. 과연 그런가? 삶은 그런가. 그런데 왠지 찝찝하군.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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