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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데로서평

[소설] 이래 봬도 대학 나온,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by 두목의진심 2023.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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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문학과 지성의 소설 명작선 네 번째 책이자 <4050 독서살롱>에서 선정한 책. 70년 대 산업화에 밀려 민주화가 가려진 세상, 그 중심에 성남이 있다. 서울 변두리에서 내쳐진 사람들이 내몰린 곳. 그들이 원주민 사이에서 스미고 버티며 일궈내야 했던 절망의 삶이 등장인물을 통해 고스란히 떠올랐다. 그 속에 유년을 보냈던 내 어린 시절도 함께.

 

첫 이야기 <양>. 무슨 의미일까, 한참을 머릿속을 헤집었다. 전후 아니 전쟁 중에 전쟁보다 더 치열했던 삶과 죽음을 업고 있던 '그'의 이야기가 아팠다. 윤봉이의 모자란 삶이 그랬고 죽음이 그랬다. 그리고 오롯이 그런 윤봉이를 업고 있어야 했던 모두의 삶이 그랬다. 아팠던 시대가. 그 웬수같던 전쟁이.

 

아, <엄동>은 기분을 순간 얼려 버렸다. 영순이 그토록 자부심 휘날리는 곳을 살 만큼 살았던 곳을 나는 썩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본가가 있는 모란 오거리의 무질서는 여전해서 더욱 피하고 싶은 곳이다. '박'처럼 내 아버지는 70년대 서울 옥수동에서 성남으로 정부 이주 계획으로 내몰리 듯 스며 들었다.

 

내 유년도 얼마쯤은 이곳에 있다. 10살 때 서울로 가서 스물이 넘고서야 다시 돌아 왔다. 그리고 결혼과 동시에 다시 떠나 여기저기로 떠돌다 마흔이 돼서야 다시 왔다. 그렇게 중간중간이 뭉텅 잘려 나갔으니 고향이랄 것도 애착은 있을 리 만무하다.

 

70년 대 초, 그때도 풍생고가 있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그 앞으로 흐르던 천은 시커멓고 각종 오물과 타이어 같은 게 흘러내렸다. 그 속에서 어린 나와 동네 꼬맹이들은 뭐라도 건져낼까 헤집으며 놀았다. 지금이야 뻥 뚫린 왕복 8차선의 복개 도로가 되었지만. 그래서 그런지 박과 영순의 일화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106쪽, 엄동

 

선의와 호의가 행하는 자와 받는 자의 입장이 얼마나 다른 온도 차이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이야기는 이래 봬도 대학을 나왔다는 자조적 다짐 밖에 할 수 없는 권 선생의 체념 어린 말이 씁쓸함으로 남는다, 고 생각 했는데 하, 아홉 켤레가 아닌 열 켤레라니.

 

"오 선생 생각은 오 선생이 경험한 바탕 안에서만 출발하고 멈춥니다. 자기 경험만을 바탕으로 남의 생각까지 재단하기는 애당초 무립니다." 244쪽, 직선과 곡선

244쪽, 직선과 곡선

 

본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다는 권 선생의 말이 가슴을 찌른다. 오 선생과 권 선생 각자의 시선에서 그려지는 일들이 마치 영화 <라스트 듀얼>처럼 흥미로웠다. 너 나 할 것 없이 어려운 시절, 우리에게 구두는 어떤 의미인가를 묻는다. 인간다운 삶에 대한 철학이 담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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