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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데로서평

[인문] 돌봄과 작업 - 나를 잃지 않고 엄마가 되려는 여자들

by 두목의진심 2022.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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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근엄한 호랑이 한 마리를 올리고 가슴에는 시커먼 늑대 한 마리를 품은 검은 망토 휘날리는 드라큘라가 있다. 시시 때때로 역할을 바꿔야 하는 돌봄이 함축된 그림이 아닐까. 이런 표지라니 책장 열기가 쉽지 않다.

 

사실 복지 현장 종사자에게 '돌봄'이란 단어가 갖는 의미는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장애인 복지에서는 알파요, 오메가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돌봄이란 단어를 보는 내내 마음이 흠칫 했던걸지도 모른다.

 

엄마라는 돌봄 종사자 11명이 마음을 모았다. 각자의 영역과 전문성을 가졌음에도 엄마로 사는 건 '내'가 희미해지는 일이기에, '나'를 잃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이들의 이야기는 허투루 읽히길 거부하는 듯하다.

 

 

정서경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읽으며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신혼의 단꿈으로 젖어들려는 이들을 손바닥에 불이 나게 축하를 하는 이유가 너도 당해봐, 였음을 내가 결혼하고 알았다. 그 심정이 바로 그가 주변 사람들의 알 수 없는 미소를 알아채고 난 그 심정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의 12년 후의 소회에 아이들이 없던 삶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라는 그리고 아이를 낳지 않았더라도 행복했으리, 라는 이야기는 아이들이 없었던 22년 전 기억이 당최 그려지지 않아 단언할 수 없지만 나는 아이들이 없던 삶을 때때로 꿈꾼다.

 

행복할 수 있을까, 에는 망설이듯 점 세 개를 넣어야 겠지만 그래도 어떤 일에 아이들을 먼저 떠올려야 하는 삶보다는 아내와 둘이 먼저 떠오르는 삶이 조금은 더 행복할 거 같다. 아이들이 주는 행복? 성장기, 폭풍이 삶 한복판에서 언제 휘말려 오를지 당최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은 불행이라기보다 막막함이다.

 

그 폭풍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는 아내의 단단함이 고맙다. 아마도 이 지점이 엄마와 아빠의 차이가 아닐까, 그의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한다.

 

40쪽, 정서경-다시 돌아갈 수 없는 삶

 

그리고 서유미의 글, 그럴 때면 나는 어쩔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라는 문장에서 그가 앞서 얘기한 소설을 쓰지 않으면 나는 행복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는 이야기 속에서 그럼에도 놓지 말아야 할 무언가는 내가 행복해야 할 이유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코끝이 찡했다.

 

나는 이 일(나는 사회복지사다)을 하지 않아도 분명 행복과는 무관할 것 같다는 예감은 이 일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적중할 건 뻔하다. 아무튼 그 문장 끝에 아이가 엄마가 참 좋아, 라는 말도 아빠가 참 좋아, 라는 말로 번역되지 않아서 더 아프다. 아주 많이.

 

아이를 품에 안는다는 행위가 모성이나 부성 같은 사랑을 담보로 하는 것이지 잘 모르겠다. 팔이 불편한 나는 아이를 안는 행위가 모험이고 도전이었으며, 심지어 두려움을 삼켜야 가능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두 팔 중에 한 팔은 더 불편했으므로 아이가 아무것도 모른 채 아빠에게 생명을 의탁하고 방긋 웃을 때는 반대로 나는 눈물이 났다.

 

식은땀(땀이 안 나지만 그런 느낌은 있으므로 흘렸다 하자)이 흥건해지고 가슴에 나는 아이를 안아들었다. 세상 조그맣고 세상 오물조물한 것이 품 안에서 꿈틀대는 동안 나는 안 나는 땀 대신 눈물을 흘려야 했었다.

 

"세상 모든 엄마는 제 자식을 버린다. 그래야만 아이는 홀로 서고 한 사람의 독립된 개체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일을 하기 위해 아이를 버렸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지금 일을 하고 있고 내가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느낀다. 아이도 자신의 삶을 자기 책임으로 떠안는 독립적 개체로 성장해 가고 있다." 75쪽, 홍한별-경계를 만드는 일

 

홍한별의 글에선, (이렇게 개별적인 느낌을 쓰려는 건 아닌데 자꾸 그래져서 좀 그렇지만 어쨌든) 그의 글에선 비장함이 느껴졌었다. '버린다'라는 표현이 그랬는데, 그도 아주 고심하고 선택한 단어였겠지만 글을 읽은 후, 그보다 적절한 단어는 없겠다 싶다.

 

어쩔 수 없는 양육의 경계에서 아이의 독립성 혹은 자율성과 나를 찾는 일은 양단간에 선택할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한쪽을 포기할 문제도 아니고. 그렇다면 그가 선택한 그 적절한 시기에 적절히 버릴 수 있음을 알아채는 것, 그래서 아이를 버려도 아이 혼자 설 수 있을 만큼만 그렇게 하겠다는 그의 굳은 의지가 아니었을까? 무엇보다 나'도' 중요하니까. 아무튼 가슴은 좀 먹먹했지만 그렇다고 슬프거나 아프진 않았다.

 

장하원의 <자폐성 돌봄의 현장에서>에서 지적하는 아이의 발달 단계에서 겪는 눈치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이의 발달 문제에 '민감해진' 엄마들은 지나치게 '예민하다'라는 평가나 쓸데없이 '불안이 높다'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렇다고 저마다의 속도로 크는 아이를 '기다려주는' 엄마로 살다 보면 아이의 발달 문제를 적기에 발견하지 못한 '무지한' 엄마가 된다." 라고.

 

이 이야기에 절로 고개가 끄덕이는 이유는 복지관 발달 치료 대기가 2년 가까이 밀려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기 때문이고, 그 대기하는 엄마들이 겪는 '빨리 알아채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너무 많이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발 그러지 마시라고 전하고 싶다.

 

보통의 아이들의 돌봄은 어쩌면 끝을 예측할 수 있다는 데에서 오는 '언젠간 지나가리' 라는 안도감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애 아동의 돌봄에는 그 끝을 예측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절망감은 당사자 아니라면 가늠조차 하기 쉽지 않다.

 

108쪽, 장하원-자폐성 돌봄의 현장에서

 

결혼을 하고,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이유가 뭔지 지금도 깨닫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28살의 나는 무척이나 결혼이 하고 싶었다. 누구에게 소속된(이 표현이 적당하려나 모르겠지만), 한 여자의 남자로 표식 되고 그와 함께 하고 싶은 것들이 프랑크 소시지 엮이듯 줄줄이 엮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프랑크 소시지 어디에도 돌봄이나 양육은 없었다. 아내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결혼하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무슨 유통기간이 있는 것처럼) 주변, 특히 부모님을 비롯한 친척 어른들의 무차별적이 2세에 대한 의무를 들어야 했다. 이제 낳아야지? 라거나 조금이 있으면 더 안 좋아, 라거나 심지어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니니? 라는 무례한 말들.

 

어쨌거나 부모님의 불안을 해소(?) 시키기 위해서 우린 노력했고 아이를 얻었다. 그걸로 충분했던 벅참은 가부장적 세대의 부모님을 비롯한 집안 어른들의 떨떠름한 축하를 받아야 했고 이내 아들은 하나 있어야지, 라는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암시로 이어졌다.

 

관심 없었다. 집안이라는 의미는 화기애애한 행복 가득한 집안이라는 분위기도 없었고 몸이 불편한 내가 노력해야 할 부분도 적지 않았고, 아이를 얻기까지 나뿐만 아니라 아내가 겪은 고단함과 고통을 십분의 일 정도나 알면 다행일 정도로 미안한 마음이 컸기에 둘째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6년의 시간을 버텨냈다. 그동안 들어야 했던 아들에 대한 은근한 압박은 말해 뭣하랴. 낳기만 하면 지들이 알아서 큰다, 라거나 지들 밥그릇을 가지고 태어난다, 는 허무맹랑한 말들 속에 결국 아내는 둘째를 낳았다. 돌이켜보면 아마 아내는 이때 첫째 딸을 낳을 때 종종 무용담처럼 했던, "힘 한번 주니까 뿅 나왔어. 별로 안 힘들더라" 라고 했던 출산의 기억이 강력하게 작동했을 것이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엄마 자궁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부터 애를 먹였다. 태동을 느낄 수 없을 만큼의 미세한 움직임만 보이고 숨만 쌕쌕 들려주던 녀석은 엄마의 입덧을 가열차게 하게 했고, 출산이 임박한 즈음까지 멈추지 않았다. 새벽, 진통이 심해지고 양수가 터졌는데도 나올 생각이 없던 아이는 13시간을 엄마를 진통의 지옥 속에 빠트렸고 아내는 수술해 달라고 애원했지만 결국 동이 틀 때쯤 자연분만으로 지옥에서 벗어났다. 아내는 죽다 살아난 후 나를 보자마자 다시는 애를 갖지 않겠다는 말부터 했으니 그 고통이야 말해 뭣하랴.

 

전유진의 출산에 대한 이야기에서 생각이 삼천포로 심하게 빠진 이유는​ 어른들의 '그건 겪어봐야 아는 것'이란 말이 저주처럼 느껴졌다는 것과 양가적 감정에 휩싸이는 일들에 격하게 공감됐기 때문이다.

 

반면, 엄지혜의 행복이 주렁주렁 매달린 가족을 보는 것 같이 돌봄의 현장을 온통 따뜻하게 그려 내는 글을 보자니 마음이 낮아졌다. 하루 종일 24시간 붙어있으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 라면서도 아이가 어린이집을 마치고 마주하는 4~5시간 동안 화는 커녕 다정한 말을 나누기도 바쁘다, 라는 말에서 나는 아이에게 다정한 말을 해준 기억을 들춰낼 수 없어 울컥해졌다. 왜 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아이에게 그리 험한 말들을 쏟아내야 했을까? 죄책감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생소한 입양지원 실천가, 라는 이설아의 글은 읽자마자 코가 벌름대더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사무실이라 급히 고개를 들어 민망함은 넘겼지만 훌쩍거리는 소리까지는 없애지 못했다. 끝까지, 아이 편에 설 결심 없이, 부모가 되는 방법은 어디 있는 걸까, 라며 내게 눈을 부라리며 건네는 질문 같았다.

 

도대체 나는 그런 결심, 아니 생각이라도 해보고 부모가 되었을까. 큰 애가 21살이고 둘째가 15살인 여태 나는 그 많은 시간 동안 아이 편이었을까? 아이들은 아빠를 그런 존재로 여겨 주고 있을까?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어 다시 코가 벌름 댄다.

 

그렇게 쏟아지는 장대비 같은 말들을 다 맞은 느낌으로 마지막 김희진의 글을 읽는데 약간 놀라움이 있다. 돌봄의 주체인 부모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 어떻게 보면 사랑을 넘치게 쏟아붓는 부모를 향해 복수하듯 아이에게 사랑을 쏟다가 아이의 삶을 훼손하는 최악의 오류를 저지른다, 라며 자신의 그러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하겠다는 다짐이다.

 

이 말이 놀랍게도 주춤거리게 하기도 했지만 모든 걸 다해 주려는 부모들이 자신들이 한 만큼 돌려 받으려 하는 모습들을 많이 봐왔기에 이렇게 사이다 같은 말이 목에 걸린 무언가를 트림으로 터져 나오게 하는 건 아닐까 했다.

 

이 책은 손에 크레파스가 묻을 것 같은 촉감의 표지 때문인지 모르지만, 작가들의 이야기가 끝났는데도 가슴에 묻어 있는 느낌이 든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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