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음가는데로서평

[사회학] 공정하다는 착각

by 두목의진심 2022. 4. 12.
728x90

 

 

내 생각엔 마이클 샌델은 이 시대 가장 가려운 부분을 참지 않고 박박 긁게 만드는 이슈메이커다. 그가 던진 정의가 그랬고, 이번 공정 역시 그렇다.

 

그의 '공정'에 대한 첫 화두가 '대입'이다. 공교롭게 딸아이의 입시를 2년 치르면서 느낀 제도의 불합리가 되살아 났다. 개인이 발휘하는 성적보다는 '운'이 작동하는 원서의 개수를 보면서 돈이 없으면 지원도 못해 보는 시스템을 우려하게 된다. 물론 성적이 좋은 누군가 상향 대학으로 빠진 자리를 물려받는 '운'에 기대지 않을 정도의 성적자라면 입시 제도가 어찌 됐든 상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제공받은 고액의 학원이나 고액 과외 같은 지원은 아무나 받는 '혜택'은 아니다. 아무튼 어쩌면 공정에 대해 논하는데 입시만큼 좋은 소재는 없겠다 싶다.

 

스스로 해냈다, 라는 능력 지표에 관한 그의 '공정론'에 대한 논점은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공동선을 찾기 위한 노력을 세밀하게 자르고 들어가면 과연 우린 이 시대 무엇으로 개인의 능력을 파악할 수 있을까, 라는 문제에 맞닥뜨리지 않을까? 아예 신생아들부터 똑같은 걸 먹이고 똑같은 집에서 똑같은 시스템으로 양육하고 교육해야 할까? 그럼에도 타고난 유전자로 뛰어난 두뇌와 운동신경, 예술적 감각 등을 가진 아이는 어떻게 봐야 할까? 놀이로는 잔인하지만 의자 뺏기는 얼핏 보면 공평한 기회를 주는듯하지만 운동신경이나 동물적 감각(눈치) 같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능력의 차이를 없애려면 경쟁이 없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상황의 희생자가 아니며 우리 운명의 주인이다. 재능과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높이 오르고 꿈을 이룰 수 있는 존재다(66쪽), 라는 이 멋들어진 말이 '기분 좋은 낙관론'이라는 그의 지적은 좌절감을 준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는 애초에 끝난 걸 알지만 그 이유가 용이 힘차게 승천하려면 개천 정도의 물이 있어야 하거늘 이미 태생이 좋지 않으면 타고난 능력이 있어도 높이 날아오르는 건 꿈도 못 꿀 판이라고 확인 시켜주는 듯하다.

 

아무리 그래도 "부자는 가난한 자보다 부자일 만해서 부자"라는 말은 너무하지 않은가. 능력주의 세상에서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고스란히 개인에게 떠넘기는 게 당연하다는 거에 상처받을 수밖에.

 

"우리 자신을 자수성가하고 자기 충족적인 존재로 여길 수록, 우리보다 운이 덜 좋았던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힘들어진다. 내 성공이 순전히 내 덕이라면 그들의 실패도 순전히 그들 탓이 아니겠는가. 이 논리는 능력주의가 공동체 의식을 약화 시키는 논리로 기능한다. 우리 운명이 개인 책임이라는 생각이 강할수록 우리가 다른 사람까지 챙길 필요를 느끼기 힘들다." 106쪽, 사회적 상승을 어떻게 말로 포장하는가

 

충분히 공감한다. 능력주의가 점점 사회를 개인주의가 당연함을 부추기고 그 안에서 나의 노력으로 이룬 성과에 대한 보상이라는 등식이 당연해지기 때문에 사회적 공헌이나 기여(봉사)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노블레스 오블리쥬는 당연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복지에서조차 대상을 선별하는 것은 얼마나 가혹한가. 특권을 타고났다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 라는 영화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의 대사를 기억한다.

 

113쪽, 자기 책임의 담론

 

또 능력주의와 함께 사회적 지위 상승 수단으로 거론되는 학력주의로 논제는 이어진다. 이 역시 능력은 개인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결과이며, 이런 상승 기류에 편승하려면 고학력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현직 대통령들의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과연 불평등에 맞는 말인가, 를 짚는다.

 

사실 나는 불평은 개인의 능력이 아닌 사회 시스템의 실패라 보는 편이라서 토머스 프랭크의 '스스로의 성공에 취한 승자들이 내린 도덕적 판단'이란 지적에 동의하게 된다. 노동자가 죽도록 일해도 수직 상승하지 못하는 이유는 고학력 때문이라면 능력주의도 한낱 허상 아닌가. 그래서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생산한 것에서 자기 몫을 요구할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149쪽), 라고 지적하면서 사람을 승자와 패자의 구도로 나누면서 학력주의를 부추기는 능력주의자들을 우려하는데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혹시 현대 사회가 능력주의를 맹신하는 이유는, 나도 노력하면 될 수 있다는 희망은 어쩌면 우리가 익히 아는 주차장 신화로 만들어진 애플,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 그리고 영업사원의 도전인 알리바바 등이 이런 개인의 능력 여부로 성공이 판가름 난다는 인식을 부추기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한편, 그는 완벽한 능력주의는 정의로운가, 라는 질문에 공정한 경쟁에도 승자와 패자는 존재하는 것으로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 치유에 있지 않고 정당화하려는데 있다고 지적하면서, 평등이 아닌 이동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경제적 능력에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서로 자리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평등 사회에서의 공평은 '타고난 운'에 따른 기울어진 운동장 자체를 인정해야 한다는 하이에크와 존 롤스의 '자유시장 자유주의'와 '복지국가 자유주의'를 통해 능력주의에 대한 대안을 피력하는데 이해가 쉽지 않다. 나는 개인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 자체를 불평등으로 보고 핸디캡이든 보상이든 어떤 형식으로든 시작이 같을 수 있도록 평평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는데, 개인이 타고난 재능이든 부자인 부모의 지원이 있든, 개인의 전망을 타인의 전망과 똑같아지게 하려 국가가 모든 조건을 통제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는 하이에크의 논리에 귀가 팔랑거리고 설득된다.

 

233쪽, 운수와 선택

 

정리해 보자면, 능력주의가 팽배한 자본주의 시장에서 '능력'은 오롯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타고난 '운' 역시 영향을 미친다는 지적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돈도 실력이며, 능력이 없으면 부모를 욕 하라'던 정유라의 개소리가 떠올라 불편하다. 어쨌거나 저자의 논점은 이런 능력주의의 가치는 변화를 위해 개인의 노력은 평등한 이동이 가능한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 여기에 행운처럼 부여받은 것을 누릴 수 있도록 기반이 되어 준 타인을 인정하고 연대할 줄 알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애초에 능력주의는 공평하지 않으며, 우리의 능력 또한 선택이나 노력 역시 그러니까.

 

어쩌면 그는 이런 과도한 경쟁 사회가 불러온 능력주의는 어쩔 수 없으니 최소한의 공동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타고났던 키워졌든지 간에 제공받은 능력의 혜택을 누리는 자들은 그렇지 못한 자들이 있음을 의식하고 어떤 태도를 갖춰야 하는가에 대한 인식이자 질문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싶다.

 

여러 날 읽었음에도 완독을 하지 못했다. 번역의 문제인가, 그저 나의 경제적 관점이나 철학적 사유가 부족해서라 생각하며 완독은 다음으로 미룬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