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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데로서평

[인문] 문장의 무게 -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by 두목의진심 2022.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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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나이를 묻는 것이 취미, 라는 작가의 소개 글에서 그의 단어와 문장이 궁금해진다. 그의 문장엔 어떤 우주가 있는지, 또 그 무게를 이기고 우린 우주를 둥둥거리며 유영하게 될는지, 기대됐다.

 

이 책은 작가가 선택한 27개의 동서양의 고전 혹은 근대 작품 속에서 우주를 품은 묵직한 문장을 펼쳐 놓는다. 모든 문장의 울림이 내게 도달했다고 할 수 없으나 그 자체의 무게로 우주를 연결하고 있다. 어째 쓰고 보니 철학자 흉내를 내고 있지만 지금 내 기분이 그렇다. 모두 마음을 울리진 않지만 그대로 의미는 사유하게 되는 문장들이다.

 

"도덕은 내일을 생각하지만 사랑은 오늘만 생각합니다. 사랑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진공상태에서만이 사랑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행위가 아닌 상태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42쪽, 사랑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의 공포로 인해 비도덕적인 것이 되어가는 것이지요

 

머리를 비장하게 밀던, 오늘만 산다던 영화 <아저씨>에서 전혀 아저씨의 외모를 가지지 않은 죄로 수많은 아저씨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던 원빈의 말은 결국 사랑이었던가. 안나가 레빈에게 불같은 외침으로 남겨야 했던 그 사랑처럼.

 

안나 카레리나, 톨스토이 /  연금술사, 파올로 코엘료 /  논어, 공자 /  닫힌 방, 샤르트르

 

"청새치를 잡는 싸움에는 목숨을 걸 필요가 없을지라도 청새치를 지키는 싸움에는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77쪽, 인간은 파멸당할 수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

 

성공이 뭔지도 모른 채 불나방처럼 날아들어 날개가 부서져라 흔들어 대지만 결국 원 없이 날갯짓을 해본 것으로 만 만족하고 추락하는 내 성공은 톨스토이를 빗대 작가가 지적하는 지독한 외로움과 포기된 욕망들, 은 아닐까. 그래서 성공의 골격도 모른 채 파멸과 패배의 속살을 생뚱맞은 아름다움으로 포장하는 관광객은 '나'일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이 어지럽게 섞여든다.

 

"언제 우리에게 도착할지 알 수 없는 것들이 가진 시간의 거리가 우리의 삶의 길이를 만든다." 111쪽, 이 엄청난 혼돈 속에서 분명한 건 딱 하나야.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삶의 실존은 어찌 됐던 타자의 끌림이 있건 없건 우린 그렇게 가거나 기다리면서 혼돈 속에 머물면서 누군지도 모를 그 '고도'를 기다리는 건 아닐지.

 

카프카의 고독, 안나의 사랑, 프란츠의 탐닉, 노인의 성공과 파멸, 시계공의 혼돈, 보르헤스의 망각, 조르바의 자유, 존재의 기다림, 죽어버린, 아니 죽여버린 신이나 인간을 파국의 나락으로 떨어트릴 수 있는 화, 삶의 희망, 안인가 밖인가 그리하여 나는 모래를 파내고 있긴 한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쾌락을 품는 지옥 자체라는 의식, 알을 인식하는 망상 그 어느 것 하나 놓치면 안 될 문장이 가득한 책들이 유혹한다.

 

164쪽, 신은 죽었다 /  304쪽, 만약, 우리 안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을 없애버린다면 도대체 무엇이 남을까?

 

책장을 넘기는 손이 조금 바르르 떨린다, 아니 전율이다. 왜 작가와 같은 책을 읽었음에도 이토록 뒷골이 서늘하거나 팔에 소름이 돋아나고 심장이 불규칙하게 빠르고 거칠게 뛰게 만드는 나는 길어 올리는 문장을 찾지 못하는 것일까. 그저 식탐 정도의 욕구는 무념무상으로 책장 넘기기에만 바빴던 나의 독서가 초라해진다. 고전과 세상의 수많은 책들이 감추고 있는 미궁 속 은유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길, 우린 작가의 어깨에 올라타 먼 곳을 응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252쪽,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오늘 왔다 오늘 사라진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말 것, 영원히 간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가슴에 새기는 것조차 포기할 수는 없다. 가슴에 새기는 미지의 그 무엇, 오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 그것만이 꿈이다." 298쪽, 꿈꾸는 자와 꿈꾸지 않는 자, 도대체 누가 미친 거요?

 

문장 하나로 이리 깊고 넓은 철학적 사유를 전달하는 책이 있었던가. 정말 소중하게 품어야 할 책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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