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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데로서평

[소설] 월 200도 못 벌면서 집부터 산 31살 이서기 이야기

by 두목의진심 2021.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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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자마자 얼마 전 집을 사버린 34살 녀석이 생각났다. 근데 이 녀석 사회복지사다. 사회복지사가 얼마나 박봉인지는, 사회복지사끼리 결혼하면 수급자 반열에 오른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만 봐도 알만하다. 의정부에 좀 연식이 있는 연립이고 어마 무시한 융자를 끼고 샀다 하더라도 대견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처럼 청년 빈곤 시대에 정말 만만세 아닌가. 그 녀석 때문이라도 이 책은 흥미로울 이유는 충분했다.

 

뭐지? 그저 MZ 세대가 좌충우돌하며 집을 산 김에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를 한 권이 모자라 두 권에 나눠 무식하게 질러놓고 내가 이리 피똥 싸며 삽니다, 라는 조목조목 반성을 담은 에세이 줄 알았는데 소설이라니.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뭔가 바람 빠진 풍선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달까. 아니면 내 기대하곤 다른데, 정도의 찝찝함이 있다. 난 청춘들의 고단함을 기대한 걸까?

 

"시도하면 작은 확률로라도 될 수 있지만 시도하지 않으면 0%야. 그냥 우리 인생이 다 그래." 1권, 38쪽

 

현우의 '우리'라는 포괄적 뭉뚱그림에서 나는 한치도 벗어남 없이, 아마 중심이겠지. 어쨌든 재테크 시도 자체를 무슨 목숨을 걸어야 하는 러시안룰렛처럼 생각하는 내가 비쳐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우리 엄마도 서기 엄마처럼 그랬다. 주식은 도박이고 성실해야 성공한다고. 평범하게 산다는 게 무엇보다 더럽게 힘들다는 걸 그 어떤 학교에서도 배운 적이 없는지라 그냥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개근상에 목숨 걸고 성실과 인내만 했다. 그렇게 근면 성실을 무장하고 나섰는데 세상은 바뀌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한참을 우물쭈물 댔던 기억이 있다.

 

개천에서 용나는 시절이야 이제 전설이고, 애저녁에 개천은 복개돼서 고속도로가 됐다. 애먼 짓을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일한 지 30년이나 됐는데 나는 여기저기 삽질만 하다가 이제서야 맥주 한 모금 정도 남겨도 욕은 안 먹는 수준에 도달했는데 의기양양은커녕 서기 이야기에 우울해졌다. 그래도 공무원은 복지포인트랑 수당 다 합치면 맥주 정도는 몇 모금 남겨도 되지 않나? 사회복지사는 남기면 쌍욕을 처먹는다.

 

정말 시종일관 현타 맞느라 어지러운데 몰입도는 쩐다. 근데 윗집 개가 우리 집도 겸사겸사 지켜준다, 는 현우의 개소리에 우리 윗집 거대한 진돗개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엘리베이터에 탈 때도 입마개도 안 시키던 무뢰배 같던 개주인들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어느 날 조용히 사라져 귀도 마음도 편타. 절대 윗집 개는 우리 집도 나도 안 지켜준다. 안 물리면 다행이다.

 

소설 속엔 31살 이서기만 있는 게 아니라 52살의 나도 있다. 서기 아빠가 남루한 작업복에 수술 침대를 밀 때는 마치 내가 그러고 있는 것 같아 순간 앞이 흐렸다. 그렇게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누구나 공감대를 건드리는 이야기가 있다.

 

 

한편으론 정곡을 찔리는 이야기에 흡 하고 숨이 막히기도 한다. 공무원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자성어로 복지부동이 있는데 어찌 보면 월급을 세금으로 받는, 그러니까 녹봉 비슷한 걸로 받는 처지인 나도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노력한 것으로 착각할까 봐, 또는 내가 잘한 것도 아닌데 잘한 것으로 착각할까 봐, 승진을 알리지 않는 서기 마음과 같아서 무릎이 절로 꺾인다. 그랬음에도 나는 승진을 바라기도 해서 더 부끄럽다.

 

서기뿐만 아니라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격하게 공감할 매일이 어제 같고 오늘이 내일과 같음을, 이 도돌이표가 그려진 오선지 일상은 내 시간을 갉아먹어야 월급을 주고 회사는 영혼을 두고 가야 하는 곳이니 자아실현은 턱도 없는 노릇이란 걸 동우의 인생 설계 한방으로 정리한다. 생각이 많아진다. 정리되지 않은 내 인생이 어질하다.

 

이 책은 MZ 세대 가난한 청춘들의 이야기라기보다 너 나 할 것 없이 그냥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 아닐까 싶다. 허름한 동굴 어디라도 기어들어가 등대고 다리만 뻗을 수 있는 집에 목숨을 걸어야 되는 미친 세상이 현실이라는 게 서글프다. 집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윗사람들 말을 잘 들어야 성공한다고, 무조건 순종하라고 배워온 나로서는 서기를 통해 내 현실을 복기하게 된다. 영리하지 못하면 죽 쒀서 개만 주는 일이 허다한 세상이란 걸 뼈에 새겼다.

 

자본주의에서 일한 시간과 경제력이 비례한다는 소라의 지적엔 내가 너보다 20년 더 살아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더라, 라고 알려주고 싶지만 소라가 말한 맥락이 그냥 따박따박 월급만 처받고 마니까 그렇게 지지리 궁상이지, 라고 할까 봐 그냥 닥치는 게 낫겠다. 삼실 청춘들을 보면 이제 막 졸업하고 입사한 햇병아리들도 주식이다 코인이다 하는데 난 30년이나 일했는데 주식 계좌 하나 없다. 그냥 월급통장 하나에 적금통장 하나 불리는 재미만 보고 살았다. 재테크는 여윳돈이 돈이 있는 애들이나 하는 거라고 에두르고 부자들은 나쁜 짓으로 돈을 불린 거라고 욕하기 바빴다. 걔들이 어떻게 돈 벌려고 애썼는지는 모른 채 하고.

 

 

"저기 저 집 사는데 영혼이라도 팔 수 있으면 좋겠다. 난." 2권, 218쪽

 

집 하나는 꼭 있어야 설움 안 받는다, 는 엄마의 애달픔에 고등학교를 벗어나는 순간 청약통장을 만들었다. 차곡차곡 오랜 기간 희망을 쌓으면서 난생처음 '1'이라는 숫자가 내 인생에 새겨졌다. '청약 1순위', 여기저기 청약을 넣고 탈락했다. 좋은 집을 찾겠다고 틈만 나면 인터넷을 뒤졌다. 비교하고 신청하고 탈락하고. 나는 집이 필요했던 걸까. 아니면 집이 오르길 기대하며 돈이 필요했던 걸까. 투자와 투기는 뭐가 다른 걸까. 어쩌면 둘 다 탐욕인 건 아닌지.

 

어쨌거나 현우의 체념 섞인 말에 가슴이 찌르르했다. 죽기 살기로 산 집이 조금씩 오르니 살만해진다. 중도금에 잔금에 영끌했던 지난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니가 뭔데 계획을 해?" 2권, 271쪽

 

왓! 이 두 권의 책 중에서 단연코 최고의 문장이 아닐까. 인생을 계획하는 게 무슨 불경한 죄라도 짓는 것처럼 '감히' 계획 따위를 세우냐, 는 소라의 질책이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으니 힘 빼지 말고 닥치는 대로 체념하고 살라는 거 같아서 씁쓸하지만 어차피 맞는 말이니 대거리도 못하고 슬그머니 다음 문장으로 눈을 돌렸다. 진심 소라 같은 친구하나 있으면 싶다.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웃고 울린다. 찐에세이인지 소설인지 구분이 안 된다. 살짝 작가의 경험이 어느 정도 녹아들었겠다는 생각이 있긴 하지만 암튼 소름 돋을 정도로 리얼해 몰입감 쩐다. 눈에서 피날 정도로 눈을 떼지 못하고 밤새 읽었다. 최고다. 미니시리즈를 정주행한 듯하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완독 후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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