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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데로서평

[철학/낭독리뷰] 덕후와 철학자들 - 덕질로 이해하는 서양 현대 철학

by 두목의진심 2021.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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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오타쿠라고 하면 약간 맹목적으로 한 가지에 빠져 있는 또라이라고 치부돼서 살짝 부정적이었던 인식이 이제는 덕후가 되고 인식도 많이 긍정적으로 변했다.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답이 없는 질문에 대한 사유가 철학이라던데 자음과 모음에서 이런 답도 없는 질문과 덕질을 일삼는 덕후를 콜라보 해서 청소년 인문 시리즈로 펴냈다. 흥미로워 서평단에 참여했다.

한데 저자의 이력을 보고 좀 더 흥미로워졌다. 자고로 덕후란 하나에 꽂혀 집착에 가까운 성격파탄에 이르는 거라고 여겼는데 저자는 장르 구분 없이 아주 다양한 덕질을 해왔다고 하니 어디까지를 덕후고 덕질로 봐야 하는지 그것이 알고 싶어졌다.

저자는 철학에 대한 궁금증으로 덕질을 시작했고 사유할수록 어려워지는 철학의 현상을 쉽게 표현하고자 그림으로 덕질을 하게 됐다고 적고 있다. 모호한 철학을 선명하게 만들고 싶은 그의 욕망의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 아닐까 싶다.

아, "이름이 실체를 존재하게 한다."라는 말에 머리칼이 곤두섰다. 이름은 존재를 정의한다는 의미는 '나'라는 존재가 '장애인'이라고 명명되면 결국 나는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됨과 동시에 존재가 증명되는 것과 같다. 휠체어라는 실체적 보장구에 탑승하지 않고 장애가 드러나지 않아 여타 다른 사람과 구별되지 않는다면 '있기는 있으되 인식되지 않는 무엇'이 되는가 싶어 심란해졌다.



참 재밌다. 덕질이 놀이가 되는 순간을 탐색하는 맛이라니! 다소 철학적 용어를 리바이벌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저자의 철학적 사유를 이해하는데 로댕처럼 고개를 숙이면서까지 심사숙고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의미 적절한 일러스트 역시 쉽게 이해를 돕는다. 그렇게 덕후 집단이 새우젓이 되는 현상학적 의미를 시시콜콜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딱 봐도 알게 해준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내용이 쉴 새 없이 펼쳐진다. 덕질의 대표격인 굿즈를 샤르트르의 실존주의와 연결 짓는 철학의 해설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인간이 왜 실존의 증명하느라 일생을 피곤하게 살아야 하는지 저절로 납득이 된다.

"자신의 모순을 직접 발견해 부인하고 진화하는 것이 헤겔의 변증법적 사유다." 60쪽

 

또 셀프 반성이 기본 베이스 양념이라는 헤겔의 변증법인 정반합의 설명은 정이 반을 만나 박살 나는 게 아니라 상생을 도모하는 합을 도출한다는 설명을 반반 치킨에 적용한 사례만 한 게 있을까 싶다. 또 개인적으로 생소한 자크 라캉이라는 철학자의 3계는 인간의 욕망과 현타의 괴리를 짚어주는데 대치동 일타 강사보다 더 쉽게 철학을 오지게 전수한다.

 

 


"요즘의 세상은 상대방의 전부를 알 수 없는데도 사람과 사건을 어떤 판단의 결과 폴더에 분류한다. 때문에 우리에겐 리좀적 사고가 필요하다. 리좀적 사고는 고정 폴더를 갖지 않는 것이다. 사람도, 접속한 역할에 따라 다른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는 리좀적 가치관이 확산되면 덕후에 대한 인식도 점차 달라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져 본다." 113쪽


이 책은 15명의 철학자를 통해 인류가 사유의 폭을 확장할 수 있었지만 어렵기만 하던 철학의 세계를 그의 덕질덕에 우린 좀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청소년 권장 도서라지만 성인에게도 피가 되고 살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뿐만 아니라 체계적으로 정리한 덕후의 덕질을 읽다 보면 그동안 부정적으로 여겨지던 덕질은 은근 어깨에 뽕을 심는다.

한때 애니메이션 업계에 종사하면서 DVD와 피겨를 사 모으며 포장도 뜯지 않고 보관만 하면서도 므흣했었는데 아내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젠 그런 덕심이 쿠크가 된 마당이지만 누군가의 덕질이 누군가에게는 손 안 대고 코풀 수 있는 기막힌 찬스가 되기도 한다는 걸 깨닫는다. 어쩌면 뭐든 덕질하는 덕후가 많아지는 건 세상을 이롭게 할지도 모르겠다. 덕후는 덕질이라는 특별하게 학습된 기술을 갖고 있다는 걸 믿게 된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완독 후 솔직하게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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