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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데로서평

[에세이] 제주에 왔고, 제주에 살아요 - 세 여자의 진짜 제주살이 이야기

by 두목의진심 2021.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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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 '진짜' 제주살이라는 말이 택시를 잡듯 세차게 흔들어 댔다. 12년 전 제주에 갔고, 제주에 머물렀던 기억에 제주살이라는 말은 언제 어디서고 홀린다. 인생을 통틀어 행복이라는 공간적 의미는 그때 3년뿐일지 모른다. 그래서 난 여전히 그 공간 속에 머문다.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육지로 쫓기 듯 돌아온 나는 가짜로 살았던 걸까?

 

'불턱' 깊은 바닷속 숨을 죽여야만 했던 해녀들이 뭍으로 나와 죽였던 숨을 틔우는 곳이라니 미처 몰랐다. 오가며 뿔소라 흥정만 해봤지 그네들의 삶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 해녀 해볼까?"라고 묻던 아내의 물음이 그렇게 쉽게 해서는 안 될 것이었음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어느 날 표선의 바다를 찾는다면 꼭 들러 보리라 다짐한다.

 

5살, 또래 아이들보다 머리가 하나 반은 더 큰 데다 춤도 격렬하게 출 줄 알아서 재즈 댄스 학원에서 성인들과 배워야 수준이 맞았고, 8급 한자에 애지 간한 영단어를 구사할 줄 알아서 운전하는 아빠 뒤에서 지나치는 것들의 이름을 외치던 딸아이가 다닌 제주도 어린이집은 아이들을 산악인으로 키워내려는 듯 한자보다 영단어보다 이 오름 저 오름 매일매일 제주도의 오름을 올랐다.

 

그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닌 딸은 '마운틴' '하스피탈' '스쿠울' 대신 '쫍잡해!'처럼 제주 사투리를 외쳤다. 어리둥절한 내게 웃으며 아내가 번역해 준 말은 '좁아서 답답해'였다. 꼭 껴안은 아빠를 밀쳐내며 답답하다는 것이다. 그때는 아이가 영단어를 잊어가는 게 아쉬웠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가 좀 더 제주를 배웠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다.

 

"신기하죠? 힘듦이 저에게 힘을 줘요."라는 이나즈의 말에 먹먹해졌다. 여유와 상처를 다듬는 제주라 생각했는데 그는 오히려 그곳에서 혹독한 삶을 만들어 간다고 하니 산다는 건 어디나 다 같다 싶다.

 

 

'제주살이의 로망을 키우는 게 아닌 이주민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표지 글에 어떤 이야기가 담길까 궁금했던 터라 책장을 덮은 지금은 아쉬움이 좀 더 크다. 솔직히 3~6년 차의 이주민의 생생한 차별기(?) 같은 현실적인 이야기를 기대했다. 나 역시 이나즈와 비슷한 시기에 제주에 있었기에 더 흥미로웠다.

 

당시 많이 들었던 말 중에 '육지 것들'이란 표현이 있었다. 이주민은 언제든 떠날 채비를 하는 정착민이 아니라는 생각에 쉽게 정을 나누지 않는 그들의 오랜 괸당(친인척) 문화는 때때로 당혹스러울 때가 많았다. 한집 건너 다 친인척이라지만 실상은 제주와 서귀포는 쉽게 넘나들 수 있는 거리는 아니어서 그렇게 떨어져 살면서 왕래가 없는 친인척끼리 사기도 당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실제로 나는 외도 아파트에서 제주 광양사거리로 출퇴근을 했는데 차로 20분 조금 더 걸리는 거리였지만 다들 그렇게 멀리서 다니냐고 했다. 복잡한 서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리 감각이랄까? 3년쯤 되니 외도에서 조천에 사는 친구네 집에 가는 길이 멀게 느껴지기는 했다.

 

태풍의 정점에 있던 출근길에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어 몸이 불편한 나는 주차장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결국 아내에게 부축을 받고 차를 탈 수 있던 일이나 어디서 날아왔는지 거대한 정화조 통이 도로 한복판을 나와 함께 달리기도 하고 손님이 오거나 말거나 얼굴만 빼꼼 내밀고 물어도 대꾸도 안 하시던 동네 구멍가게 할머니나 마음에 들었던 운동화는 사이즈가 없어서 못 판다는 불친절도 겪었다. 또 수업 중에도 '이 사람이 나랑 싸우자는 걸까?' 싶을 정도로 틱틱 거리는 수강생 때문에 맘도 상하기도 했다. 책 속에 나오는 근사한 이웃만 있는 건 분명 아니다. 알지 않은가 또라이 불변의 법칙을. 사람 사는데 다 거기서 거기다. 어쨌든 3년을 버티면 30년은 살 수 있다고 했는데 나는 3년을 넘기면서 제주를 떠났다.

 

물론 여행자들과는 다른 이주자에 대한 이런저런 불친절하고 틱틱거림이 '정붙일만하면 떠나버리는' '제주에서 돈 벌고 도시로 내빼는' 이주민에 대한 상처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후에는 이해되기도 했지만 꽤 오랫동안 불편한 이물감처럼 겉도는 사람으로 느껴졌었다. 지금이야 어떤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도시에서 살던 이주민과 제주 토박이의 삶의 태도나 문화적 차이에서 생기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기대했지만 역시나 제주 생활에 대한 로망에 더 가까운 이야기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그때의 감각이 살아날까 설렜다.

 

 

기억은 감각을 동반한다. 매일 무겁게 내려앉는 어둡고 습한 고사리 장마가 휩쓰는 4월의 바람과 적당하게 높고 푸르게 시린 파랑 하늘과 그 안에 투명한 하얀 구름이 몰려다니는 5월의 바람은 색도 냄새도 다르다. 매일 매월이 다른 감각의 세포를 깨우고 입히는 제주에서의 삶은 날이면 날마다 좋은 건 분명 아니다. 외지인 혹은 육지 것이라는 편견이 있을 수 있고 경계를 모르고 침범하는 타인의 영역도 비일비재해서 오해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여행객으로 취급되어 바가지도 써야 할 때도 있고 외지인이 이주민이 아니라 정착민이라 존재를 설명해야 하는 피곤함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계의 눈빛이 이웃의 관심으로 변하기까지의 시간 속에 조금씩 변하는 삶의 태도 역시 알아채는 즐거움이 있다. 1시간 반을 넘게 시달려야 하는 출근 길이 20분이면 충분한 거리가 된다는 일, 출근길에 고개를 묻고 쪽잠이라도 자야 하루를 버틸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 일은 하루하루 달라지는 하늘 높이, 바람의 끈적임, 눈부신 빛을 놓칠 새라 창문을 열고 두리번 거려야 하는 일로 바뀐다는 일은 상상 보다 엄청나게 행복하다.

 

저자들이나 나나 아무리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려 해도 좋은 건 좋으니 어쩔 수 없는 사실이 아닐까. 아, 쓰다 보니 가슴은 다시 제주도에 있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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