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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데로서평

[교양/에세이] 주기율표

by 두목의진심 2018.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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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주기율표>는 어쩌면 저자의 인생을 연표로 나열한 책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왜 인간인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포함해 전혀 인간적이지 않은 혹은 못한 일들에 대한 저항이나 분노를 담담하고 무심하게.

120여 개의 원소 중에 자신의 인생을 닮은 원소를 찾아 화학자로서 어떻게 그것들과의 동질성이 있는지 느릿하면서도 화학자임과 동시에 환영받지 못하는 유대인의 삶을 기피 새겨 넣는다.

사실 이 책은 정용선 작가 쓴 <장자, 고뇌하는 인간과 마주하다>를 읽으며 화학 원소를 통해 인생을 통찰하는 '프리모 레비'의 삶이 너무 궁금했었다. 레비는 가족과 친척 혹은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재치있게 풀어내면서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가 약간은 숨 쉴 공간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첫 원소는 다름 아닌 아르곤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래서 스스로는 그 어떤 것도 하려 하지 않는 비활성 기체.

그런 아르곤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숨겨진 존재처럼 살아야 했던 유대인의 삶으로 시작한다. 인간을 위해 오신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의 후손. 이 일로 그들은 정착할 땅을 갖지 못하고 세상을 아르곤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야 했던 인생을 녹여낸다. 알고 보면 정처 없이 떠돌며 존재감 없이 살아야 했던 무거운 민족사를 장편 영화를 본 것처럼 여러 인물을 이야기가 친절하고 가볍게 그려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연은 상상력이 전혀 없는, 지루한 금속이라 표현하면서 자신의 연애사를 곁들인다. 그녀는 바로. '리타'. 남자 친구가 있는 그녀를 그래서 더욱 좋아했다는 레비의 사랑은 지루했을까.



"삼류 해적 파쇼 이탈리아는 알바니아를 점령했고, 당장이라도 큰 재앙이 닥칠 것 같은 예감이 끈끈한 이슬처럼 집과 거리 위로, 조심스러운 대화와 반쯤 잠든 양심 속으로 내려앉아 엉겨 붙었다." p57


아, 화학을 전공하는 과학자의 미친 감수성이 눈길을 잡아 끈다. 시구절 같은 문장을 음미하듯 여러 번 되뇌게 된다.


"몇 달 전에 인종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었다. 그래서 나도 외톨이가 되었다. 내 기독교인 학우들은 예의 바른 사람들이었다. 그들뿐 아니라 교수들도 내게 적대적인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뒤로 물러서는 것을 느꼈고, 나도 조상 대대로 내려온 행동방식에 따라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우리가 서로 나누는 시선에는 아주 미약하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는 불신과 경계심이 늘 번득였다. 너희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너희에게 대체 무엇인가? 여섯 달 전과 마찬가지로, 미사를 보러 가지 않을 뿐 너희와 같은 사람인가? 아니면 '너희들 중에서 너희를 비웃지 못하는' 유대인인가?" p62


인간에게 꼭 필요한 철은 "철을 가졌다"라고 외칠 정도로 의미 있는 금속이다. 이런 금속을 통해 레비는 인간이 지녀야 할 '신뢰'를 이야기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오랜 시간 친구였음에도 나치의 '인종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자 멀어지는 사람들을 보며 레비의 심정이 어땠을까. 결국 레비는 철과 같은 친구 산드로와 함께 어두운 시대를 버텨낸다 하지만 결국 그를 잃는다. 레비의 상실감의 크기는 도대체 얼마나 컸을까 짐작도 되지 않는다.



"오늘에 와서, 한 인간을 언어로 옷을 입혀 인쇄된 종이 위에서 다시 살게 하는 것이 부질없는 일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특히 산드로와 같은 사람은 그렇다." p75


납과 수은. 인간의 욕망처럼 꿈틀대는 납. 인간의 정신을 혼돈으로 밀어 넣는 수은. 이 두 가지의 원소의 내용은 의미심장하다. 책장의 색이 다르다는 만든 건 편집자의 재치다.

나치에 의해 실험 대상이 되어야만 했던 수용소의 참혹한 일들을 연구실에서 당뇨치료제 연구라는 미명하에 매일 인을 매일 주입당해야 했던 토끼의 현실이 자신의 수용소에서 동물 취급 당하는 현실에 대한 부당함을 풀어낸다. 티타늄의 강함에서 느껴지는 의외의 자상함이나 따뜻함은 마리아를 행복하고 기분 좋게 만든다.

읽는 내내 몰입도가 높은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원소와 레비의 삶을 생각하느라 한참을 머물러야 하기도 했고 원소의 성질을 이해하기에는 화학이라는 학문은 내겐 너무 먼 당신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레비는 인간이 처한 극한의 상황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절망에서도 인간이라는 원소가 가진 특징은 한계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음을 알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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