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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데로서평

[인문/경영] 명견만리 : 미래의 기회 편

by 두목의진심 2016.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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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하지 못 했던 미래, 우리가 가져야 할 통찰"


프롤로그 제목에서 보여주듯 이제는 더 이상 미래를 예상하거나 예측하기 어려운 시대가 아닌가 싶다. 만화 속에서나 등장하던 미래 과학이 이미 실생활 깊숙이 밀려들었고 우리는 그런 과학을 '혁신'으로 미화하며 거의 숭배에 가깝게 대접한다. 그런 변화나 흐름에 편승하지 못하고 뒤처지며 자괴감을 느끼는 현대인이 심심치 않게 있을 것이며 나 역시 여기에 자유롭지 못한 기계치에 가까워 이런 흐름이 어지럽다.

<명견만리>는 이런 과학이 전부인양 변화를 지배하는 현상에 인문학적 소양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프로다. 그리고 그 내용을 묶어 두 권의 책으로 펴냈다. 그중 미래의 기회 편을 읽었다. '윤리', '기술', '중국', '교육'의 큰 카테고리를 통해 미래를 통찰하지는 못하겠지만 트렌드의 흐름은 알아챌 수 있는 내용을 담았다. 그리고 그런 흐름을 고민하게 한다.

<1장: 착한 소비, 내 지갑 속의 투표용지>를 읽다가 낯익은 상호가 나온다. 다름 아닌 '바라봄 사진관'. 올해 추석을 맞아  복지관에서 어르신들의 장수 사진을 기획하고 여기저기 사진촬영을 재능 기부받을 곳을 물색했었다. 급작스럽게 준비된 행사여서 시간은 없는 데다가 마땅히 나서는 곳은 없어 발을 동동 구르다 섭외하게 된 곳. 급작스러운 스케줄에 곤란함을 표시하시다가 취지를 설명하자 기꺼이 촬영에 액자까지 도움을 주신 곳이다. 너무도 감사한 곳이다. 이런 착한 소비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2장: 깨끗해야 강해질까, 강해야 깨끗해질까>의 '김영란 법'은 우리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접대와 청탁의 행위를 '문화'로 이야기하는 국민들의 인식 자체가 이미 문제다. 청탁과 접대는 문화가 아니라 그저 없어져야 할 '행위'다. 그럼에도 반쪽짜리 법안으로 만든 정치인들의 청렴에 대한 인식의 부재는 언제쯤 끝을 보일까. 그들이 갖는 특권의식이 이런 더럽고 부패한 청탁과 접대를 만드는 원인임에도 청렴에 대한 결핍은 언제쯤 채워질까. 도대체 우리에게 그런 희망은 있는 걸까?

<3장: 인공지능과 함께할 미래>에서는 인간의 직관을 넘어설 수 없을 거라던 알파고가 바둑 천재 이세돌을 벼랑 끝으로 몰아갈 때 비로소 사람들은 인공지능의 두려움을 떠올렸다. 과연 인공지능의 발전이 축복일까? "인간의 선함을 믿는다"는 일부의 사람들의 말은 그저 바람일 뿐이 아닐까? 그동안 상상력의 끝을 봐왔던 만화나 영화의 한 장면이 현실에 재현될 때 사람들은 자조 섞인 탄성을 쏟아냈다. 그런 인공지능이 매트릭스나 터미네이터 같은 현실을 만들어내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인공지능은 축복 따위가 아니라 재앙이라는 생각을 한다. 단순하게 사람의 일자리나 빼앗는 인공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라는 종(種)을 없앨 수 있을 거라는 위협은 언제나 존재할 테니 말이다.



"인류가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연산과 같은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희생, 양보, 사랑과 같은 인간 본연의 숭고한 정신이 그 바탕이었다. 기계들이 아무리 똑똑해진다 해도 인류가 고난과 좌절을 극복하고 획득한 자유, 인권, 민주주의를 이룰 수는 없다. 그러니 결국 인공지능이 인류 문명과 아름답게 공존하는 미래를 만드는 열쇠는 인간의 손에 있다." 99쪽

<4장: 누구나 천재가 될 수 있는 시대>는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우리 선조들의 공유 정신이 현대의 "우리는 나보다 똑똑하다"라는 개방과 공유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다는 사실이 조금은 씁쓸해지는 대한민국 민낯이 아닐까. 우리는 지금 진정 선조들이 알려준 공유의 가치를 이해하고 있을까. 실리콘 밸리를 넘어 세계가 개방과 공유로 하나가 되는 시대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있어야 할까를 고민한다. 아주 열렬하게.

<3부의 중국 편>은 거대함을 이미 너머 선 중국의 문제를 다름 아닌 '방 안에 들어온 코끼리를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언뜻 보면 처치 곤란의 골머리 앓는 문제쯤으로 여기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사실 좁아터진 방안에 코끼리를 어떻게 하는 문제가 아니고 그 속에서 공존해야만 하는 '우리들의 문제'를 인식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의 시장'으로 탈바꿈한 중국의 변화는 과연 중국이 '어떻게 변화할 것이가' 혹은 '어디까지 거대해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앞으로 변화 지속 가능한 한국의 미래가 아닐까 하는 고민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9장: 왜 우리는 온순한 양이 되어갈까>를 읽으면서 26년 전 내 대학 생활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 시절 대학이란 '학력고사'라는 고지를 넘어서기 위해 학창 시절을 죽기 살기로 공부해서 입학 한 후에는 대학의 낭만(?)인 소위 '다마수'나 '음주가무'를 즐기며 숨 막히는 입시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이었다. 입학하자마자 취업을 위해 스펙을 쌓기 위해 전쟁을 해야 하는 곳은 아니었다. 물론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치열한 스펙을 쌓아야만 하는 정글은 분명 아니었다. 그때는 원대한 꿈을 꾸고 대학에 들어왔다면 오히려 너무 헐렁한 교육의 질에 실망했을 수도 있고 "차라리 등록금을 모아 땅이나 사는 게 낫겠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리기도 했다. 그런 대학교육이 지금은 '취업 준비소' 역할로 전락한 사실 앞에 교육의 질로만 보자면 그때나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사실이 씁쓰레하다. 눈 깜짝할 사이보다 더 빠르게 변하는 요즘. 지금 존재하는 '일'이 앞으로 존재하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는 현대에 4년 내내 '전공' 하나를 정해서 목을 매달고 전진해야 하는 교육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과연 대학교육이 유의미한 곳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하는 시간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학 문을 나설 때 손에 주어야 하는 것은 방문 하나만 열 수 있는 톱니 열쇠가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여야 한다. 그런데 대학은 오히려 과거보다 훨씬 더 퇴보하여 단순한 취업 공부로 학생들을 몰고 있다." 262

 <10장: 지식의 폭발 이후, 어떤 교육이 필요한가>를 읽다가 생각나는 일이 있다. 초등학생인 아들이 수학 시험을 보고 아쉬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풀이과정이 맞았음에도 계산이 틀려 큼지막하게 'X' 표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답이 틀렸다는 것은 알지만 나름 고민하고 생각해서 풀어나간 과정이 답이 맞지 않았다는 이유로 통째로 '틀린 것'이 된 사실은 좀 가혹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다. 이미 정해진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지 그 답이 맞고 틀리고는 중요한 게 아니지 않을까. 여러 가지 논란과 생각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아직 어린아이들에게는 조금은 더 관대하게 실패를 가르치는 것보다는 생각의 힘을 가르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답은 틀렸지만 과정이 맞았다면 그만큼의 격려와 실패가 아니라는 도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공감하게 된다.

"매년 11월이면 수능이 치러진다. 열아홉 살에 치르는 이 한 번의 시험으로 인생의 많은 부분이 좌우된다." 297

이 단 한 번의 시험에서 설사 실패하더라도 아이들이 인생의 끝은 만난 것처럼 좌절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런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한다. <명견만리>는 제목 그대로 멀리 생각하는 눈을 틔우게 만들어준다. 이는 독자로서 부모로서 국민으로 다양하며 의미 있는 '생각'을 하게 해준다는 점과 방송에서 미처 느끼지 못 했던 것들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게 해준다 점에서 추천할만한 책이다.

 


글 : 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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