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기다림에 관한 이야기다."
대놓고 기다림을 이야기하는 이 영화는 기적을 기다리는 영화다. 90년, 2000년대 초 LP라든지 헌책방, 손편지, 청군, 백군 운동회 등 아날로그의 레트로 감성이 물씬 묻어 나는 장치를 통해 추억을 소환하기도 하고 어딘지 모를 뭉클한 삼각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웃어도 외로워 보이는 영호(강하늘)를 마음에 둔 수진(강소라)은 저돌적으로 마음을 표현하지만 영호는 초등학교 운동회날 엎어져 속상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주었던 잠시 스치듯 만났던 소연(원지우)을 잊지 못한다. 그런 영호는 수소문 끝에 소연에게 편지를 쓰고 그 편지는 언니 소연의 병시중을 들고 있는 소희(천우희)에게 전해진다. 병상에 있는 언니에게 신선함을 주고 싶었던 소희는 언니를 대신해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한다.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던 영호는 규칙을 어기고 소연을 궁금해한다. 그리고 12월 31일 비가 내리면 만나자는 소연의 답장이 도착한다.
첫눈이 아닌 비라니, 이 기적 같은 날이 올 수 있을까?
"나는 그 사람하고 뭐가 다르니?"
가슴에 훅하고 서글픔이 밀려들었다. 저돌적이지만 깨질 듯 조심스럽게 마음을 전하는 수진의 체념이 담긴 듯한 질문에 영호는 어쩔 수 없는 미안함을 담는 이 장면에서 관객은 아마도 이어지지 않았던 첫사랑을 죄다 소환하지 않았을까.
"너는 별이고 그 아이는 비야, 너는 눈부시고 그 아이는 위안을 줘"
영호의 사랑이 차라리 비가 내리는 눈부신 별이었으면 어땠을까? 언제, 얼마나 내릴지 모르는 비를 기다리는 동안 계속 아파해야 할지 모르니 말이다. 어쨌거나 이 영화는 손바닥이 간지러울 정도의 오글거림도 없지만 눈을 뗄 수 없다. 수진이 줄곳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어 하는 이유 역시 단지 외로움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기도 하고, 살고 싶은 희망을 갖던 소연의 기적이 끝을 내는 일도 줄곧 잔잔하게 마음을 흔든다.
기적의 날, 영호는 소희가 아닌 소연을 만나게 될까? 오랜만에 열린 결말이 마음을 촉촉하게 만들어 준 영화다.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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