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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데로서평

[에세이] 결혼은 이들처럼, 아내를 우러러 딱 한 점 만 부끄럽기를

by 두목의진심 2023.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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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라. 오랜 세월 함께 지내는 동안 어찌 딱 한점만으로 동반자의 인생을 퉁칠 수 있을까? 나는 하도 꿇어 무릎에 굳은살이 박혔거늘. 암튼 발칙한 제목에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 소개를 읽다 어라? 인문학? 제주? 낯익은 이름에 뒤적여 보니 <인문학 쫌 아는 어른이 되고 싶어>의 저자다. 나는 '말 그대로 간결하고 감칠맛 나고 재밌는 인문서'라고 서평했다. 믿고 읽어도 좋겠다.

 

http://https://doomoks.tistory.com/1143

 

"인간이 새기는 무늬는 인문(人文)이다. 인간은 어디에 무늬를 새기는가?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과거와 미래 사이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 제 존재를 새기고 떠난다.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인간이 세상에 남긴 흔적의 총량이 인문이다. 즉, 한 인간의 삶 전체가 인문이다." 8쪽, 프롤로그

 

캬, 역시 철학을 전공한 인문학자답다. 인문을 이렇게 철학적으로 표현하다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게다가 아내와 주고 받은 무늬 보고서라니. 오늘이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는데 웬걸 올 들어 가장 훈훈해졌다. 당장 제주도로 가서 그를 알현하고 싶다.

 

그렇지. 사랑에는 수고가 따르고 끝까지 애써야 행복할 수 있는 것,이라는 걸 새삼 그의 통찰에서 뼈 때리게 깨닫는다. 갱년기는 10년쯤 버티면 된다는 데 10년에 10년을 거듭하는 아내의 갱년기가 왜 하필 이 타이밍에 떠오르는 것인지.

 

25쪽, 4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그가 옮기니 확 와닿는다. 레알 공감한다. 결혼을 두고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하면 하는 게 낫지 않아? 라는 되도 않는 말로 진실을 가린 친구 A는 자신의 말에 현혹돼 그 후회의 열차 칸에 동승하겠다는 친구 B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아마 A는 눈빛은 그랬어도 속은 너도 당해봐라, 라는 심정이었을지 모른다.

 

어쨌든 A는 결혼식장에서 환하게 웃는 B의 얼굴을 끝으로 한동안 B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나는 그런 일련의 과정을 다 지켜보면서도 입을 닫고 있던 나는 A와 공범인가? 아무튼 결혼을 떠올릴 때 후회라는 말이 자연스럽다면 이미 볼장 다 본건 아닐까 싶다. 차라리 세금을 더 내고 마는 게 어떨지 스드메 전에 결단하시길.

 

"신은 때때로 자신이 빛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우리를 어둠 속에 두기도 한다. 그때 우리는 단 하나의 질문에 집중할 수 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조차도 없앨 수 없는 어떤 의미가 내 인생에 있는가?" 31쪽, 5

 

84쪽, 18

 

제 여인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우주 전체를 압축해 놓은 것보다 무겁고, 헌신과 책임을 무한 감내하겠다는 고백이라니. 이 남자, 제 정신인가 싶고, 이 세상 남편들의 욕받이도 감내하겠다는 의지인가 싶어 그냥 헛웃음이 났다. 그나저나 이 매력적인 하오체는 일상 언어일까? 참 귀에 착 붙는다.

 

들키면 할 수 없지만 최대한 아내 모르게 빨래를 하자, 라는 말은 분명 가사노동을 하지 않는 나와 같은 부류들이 들으면 심히 빡칠 말인데도 이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가사노동도 사랑으로 변질 시켜버린 그의 능력에 감탄하며, 내 아내는 그런 마음이 아닌 듯하여 얼마간 심난하다. 청소기와 빨래는 내가 눈에 알짱거릴 때만 돌아간다.

 

"다른 사람의 깨달음이 내게 정답이 되지는 않는다. 내게는 내 정답이 있다. 그 정답은 언제나 아내에게로 향한다." 122쪽, 29

 

그래서 그랬나 보다. 백날 남이 쓴 자기계발서를 읽어대도 나는 그들처럼 살지도 성공도 못하고 찌질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고, 그 이유가 나였다는 것과, 정답은 내 아내였다는 걸 이제 깨달으니 슬픈데 기쁘다. 그나마 아주 조금은 그 정답에 가깝게 살아내는 거 같기도 해서. 요즘 아내 말을 잘 듣는 편이다.

 

취소다. 이렇게 재치 있는 필력을 갖춘 인문학자를 제주도까지 가서 보고 싶던 마음이, 지구를 돌고 돌며 한껏 높여 놓은 입맛 수준을 다 버리고 바다 건너 촌집에 틀어박힌 초딩 입맛에 맞출 정도로 자기애 넘치는 그의 아내가 보고 싶은 것으로 바뀌었다. 둘 중 한 명만 알현이 허락된다면 단연코 우연히 선착순이 빨라져버린 B일 것이다.

 

"위대한 사랑은 위대한 사람이 하면 된다. 사소한 사랑으로 오늘 하루를 채울 수 있다면, 그 하루가 매일 매일 계속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172쪽, 41

 

180쪽, 43 수전 손택

 

누구보다 연민이란 감정에 날카롭게 반응하던 시기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완전 해방은 아니지만 그래도 살짝 비켜내고 무시할 정도의 날이 좀 무뎌진 정도랄까.

 

날벼락 같은 사고로 뜬금없이 20평생 살아온 몸이 완전 다른 동작 방식으로 재편 됐다. 일명 지체 장애라는, 아주 조금의 기능만으로 축소됐다. 그동안 힘들여 하지 않아도 수월 하던 것들이 죽을 힘을 다해도 수월해지지 않는 경험치가 상당히 오랜 시간 익숙해지지 않으니 그와 정비례하는 만큼 예민함도 치솟았다.

 

말하자면, 괜히 건드리면 성질머리 드러내며 지랄발광하는 수준이라 불알친구 아닌 이상 웬만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장려되는 수준이었다. 이런 내게 손톱만큼의 관심을 드러내는 이성에겐 그의 미모와 지성은 따지지도 않고 동정 따위 개나 줘버리라고 손톱을 뽑아버릴 기세로 덤볐다. 그런 내가 아내를 만나고 감사와 존경을 배웠다.

 

그래서 이런 류의 책은 내가 써야 하는데 지적 수준이 그의 발바닥 높이 정도니, 그가 절절하게 담아 놓는 아내 공경에 숟가락을 담가 본다. 이 마음 부디 아내에게 스치기라도 하면 좋겠다.

 

209쪽, 50

 

아주 굵은 고딕체로 한눈에 들어오는 신사임당의 유언과 그 유언을 콧방귀로 날려내고 고작 10년의 생사를 연장한 남편의 이름에 빵 터졌다. 그리고 그의 결연한 다짐에 다시 한번 쿡 하게 된다.

 

오호라, 제목의 발칙한 그 딱 한 점의 부끄러움이 고작 초딩 입맛 대로 드시겠다는 거라니 다소 김빠지는 게 이상하지만 기분은 좀 그랬다. 고작 녹색간판 샌드위치가 뭐라고.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신과 날카롭게 만난다. 사랑은 신을 가리키는 나침반이다." 91쪽

 

이 책은 인문학자가 쓴 사랑학개론이 아니고 무엇이랴. 재치가 범벅이지 않은 구절이 없다. 세포 하나 하나 건드리지 않는 감각이 없을 정도로 재밌게 읽었다. B가 아내가 되기 전, 서울 깍쟁이 여인이던 때 그가 날린 고백 문자를 보지 못했으면 말을 말아야 한다. 사랑을, 결혼을 망설이고 있다면 추천한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완독 후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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