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에 왜 태어났냐, 라고 직설적으로 묻는 친구들 노랫가락에 잠깐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그럼에도 뭘 하고 싶지도,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그나마 반항을 오지게 하던 질풍노도의 시기에도, 그래도 죄송하진 않았다. 죄송하다니… 너무 처연하지 않은가.
내 유년 시절과 닮은 듯 닮지 않은 그의 이야기에 맥이 좀 빠졌다. 가부장적이고 음주 가무에 뛰어났던 아버지는 맨정신으로 귀가하는 걸 본 적이 없었고 말을 안 듣는다는 이유로, 장남이라는 이유로 이해할 수 없는 매질을 당하기도 했다. 공부를 안 한다는 벌로 TV며 라디오 선은 잘려 나가기 일쑤였다. 내 유년 시절은 분노가 가득했다. 방문이고 장롱이고 벽이고 주먹질의 흔적이 곳곳에 남았다. 그래도 죽음을 떠올리진 않았던 터라 그의 깊은 상처가 조금은 힘겹다.
나는 그런 아버지 덕분으로 두 가지 좋아진 게 있다. 하나는 음주를 하지 않는다. 체대 신입생 OT에서도 선배들이 고무신에 가득 소막(소주와 막걸리) 폭탄을 퍼부어도 마신 후를 장담할 수 없어 버텼다. 물론 또라이로 찍혀 캠퍼스의 낭만 따위는 개나 줘버렸지만. 두 번째는 바벨탑처럼 높은 자존감이다. 아버지가 찍어 누르려고 하면 할수록 반항기는 치솟았다. 다행스러운 건 삐딱한 비행보다는 운동으로 에너지를 소진했다. 그래서 공부 못한다고 비난하고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시는 거에는 나는 걔들보다 운동도, 싸움도 훨씬 잘 하니 괜찮다고 맞섰다. 이때 탑재된 자존감은 목이 부러져 장애인이 된 지금도 낮아지지 않았다.
읽다 보니 그와 공통점이 사회복지사라는 거 말고도 또 있다는 걸 알았다. 병원에서 생존 독서를 시작했다는 것, 원래 책은 라면 받침이나 간이 베개 정도로 쓰는 거지 읽는 용도가 아니었다. 교과서는 수면제였고. 목이 부러지고 식물인간처럼 꼼짝 못하고 누워만 있다가 반년이 훨씬 지난 어느 날 뜬금없이 손가락 하나가 눈에 보일까 수줍게 살짝 움직였다. 몇 번의 수술과 재활이 급물살을 탔고 등받이가 있으면 앉을 수 있게 되자 시간이 갑자기 더디게 흘렀다. 독서가 그 시간을 메꿨다. 오른손의 미미한 움직임은 책장 넘기는 재활이 되었다. 그때 이후 나는 수잔 손택이 그랬다는 것처럼 무념무상 TV를 보는 것처럼 그냥 읽는다. 그런 즐거움은 안 해 봤으면 모른다.
어쨌거나 그가 받은 학대와 내 고난의 재활은 다른 이유였지만 그도 나도 어쩌면 책은 무력감과 끝없는 우울의 심연으로 빨려 들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동 학대는 특정 이상한 가족, 이상한 사람에게만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다. 아이를 한 인격체로 보지 않고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기에, 타인에게는 하지 않았을 언어적·비언어적 폭력을 남발하는 사람이 바로 '엄마·아빠'이고,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장소가 바로 '가정'이다." 187, 23 트라우마 승화 시키기
숨이 콱 막혔다. 문장 하나가 집채만 한 무게로 가슴에 얹힌다. 내 이야기 같아서, 우리 집 같아서. 그의 양어머니 모습이 내 모습에 겹친다. 나는 손찌검만 안 했을 뿐이지 말로 그보다 더 많이 때리고 할퀴지 않았을까.
나는 아들에게 경기하듯 비난을 얹어 소릴 지른다. 가만 생각해 보면 공부를 안 한다는 거나 하루 종일 게임을 한다는 것은 내 입장이고 아들의 입장에서는 공부는 학교와 학원을 다니는 정도로 충분하고 있는 거고, 게임도 해도 해도 여전히 목마를 뿐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저러다 대학도 못 가고 지 밥벌이도 못할까 싶은 염려는 다 저 잘 되, 라고 질러대는 걸까 아니면 남은 내 삶을 염려하는 걸까 궁금해진다. 내 화의 원천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반성하고 또 반성하면서 아들에게 우리 집은 행복하고 안전한 곳이길 욕망한다.
나 역시 사회복지이기도 하고 같은 매체에 칼럼을 쓰기도 해서 얼핏 작가를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은 30권의 책을 통해 작가가 경험한 서른 개의 인생이 닮긴 듯하다. 태어나 죄송한 그의 삶이 태어나 참, 다행으로 되기까지 한 줄 한 줄 옥죄는 마음으로 읽었다. 그의 치유의 글쓰기를 응원한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완독 후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
'마음가는데로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회과학] 나는 인공지능을 변호한다 - 메타버스를 건너 디지털 대전환까지 (2) | 2022.04.06 |
---|---|
[인문] 문장의 무게 -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0) | 2022.04.02 |
[인문] 버지니아 울프의 방 - 성을 넘어 자기가 되는 삶 (0) | 2022.03.27 |
[사회학] 결혼은 안 해도 아이는 갖고 싶어 - 정자은행과 생식의료에 관한 이야기 (0) | 2022.03.23 |
[경제경영] 디지털 신세계 메타버스를 선점하라 - 앞으로 인류가 살아갈 가상 세계를 위한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 (0) | 2022.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