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지도 못하는 작가가 알지도 못하는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기사가 나오자마자 <채식주의자>를 주문했다. 세계 3대 문학상? 맨 부커상? 호기심에 이리저리 검색하다 보니 영화도 만들어져 있다. 이렇게 내 관심 밖에 존재한 무언가에 호기심이 느껴지는 게 얼마 만인가. 빨리 읽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우울하다. 아니 무섭다는 느낌이다. 그녀의 관념적인 부분이 내게도 스밀 것 같이 축축하고 음습한 느낌이 싫다. 프랑스 만화가 잉키 밸랄의 음습한 그림이 떠오르고 김윤아의 몽환적이고 느린 노래가 머리에 떠다닌다. 그런데 놓을 수 없다. 작가의 표현대로 염오(厭惡)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어두운 내용이지만 몰입도는 굉장하다. 영혜의 말하지 않는 관념이 궁금했고 영혜 언니가 갖는 멈추지 않는 영혜에 대한 집착 혹은 관심이 그러했으며, 형부가 탐한 '날 것'에 대한 환상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랬다. 왜 영혜는 나무가 되어 가야만 했는지. 물구나무 서서 뿌리내리려 했는지. 영혜의 관념이 작가의 관념과 겹쳐진다. 영혜는 저자가 아닐까. 표지에 무표정하게 핏기 없는 얼굴의 저자는 그저 영혜다.
<채식주의자>는 이유 없는 어떤 관념에 대한 스스로 내린 정의가 아니라 타자에 의해 관념화된 제목이다.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육식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차별과 폭행에 시달려야 하는 영혜에 대한 집단적 '정의' 혹은 '단정'이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의 중편 세 편이 묶였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세 사람의 화자로 이야기한다. 독특하면서 상상력 풍부한 이 책은 우울하고 섬뜩하다. 서로 다른 이유로 부부가 된 사람들의 외롭고 아픈 사랑 이야기 같으면서도 어린 시절의 경험이 어느 날 갑자기 뜬금없는 관념으로 뿌리박히고 벗어날 수 없는 그냥 그런 일이 돼버리는. 그러다 결국 관념은 신념이 되어 자신조차 잃어가는 이 시대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
인간의 욕망이나 삶, 죽음 같은 존재에 관한 성찰이 작가의 상처받은 영혼에 대한 위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섬세하고 정교하며 감각적이다.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섬뜩할 정도로 기분이 가라앉는다. 베란다를 차고 뛰어올라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은 과연 뭘까? 나비가 새가 날아오르는 이유가 뭘까? 영혜가 조용히 입을 닫고 음식을 거부하고 햇볕과 물만 있으면 존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나무 같은 아니 이미 식물로 진화한 그녀가 머리에 뿌리내린다. 성실하고 가슴에 담기만 하는 언니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나 역시 집 안으로 들어가 물도 없는 욕조에 드러누워 세상 가장 아늑한 곳이 존재한다는 위안을 얻어야 할까. 책 한 권을 읽었을 뿐인데 이렇게 많은 생각들이 뒤엉키긴 처음인 것 같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43쪽 채식주의자
"그제야 그는 처음 그녀가 시트 위에 엎드렸을 때 그를 충격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 나오는 기이한 덧없음, 단지 덧없음이 아닌, 힘이 있는 덧없음. 넓은 창으로 모래알처럼 부서져내리는 햇빛과, 눈에 보이진 않으나 역시 모래알처럼 끊임없이 부서져내리고 있는 육체의 아름다움…… 몇마디로 형용할 수 없는 그 감정들이 동시에 밀려와, 지난 일년간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던 성욕조차 누그러뜨렸던 것이었다." 104쪽 몽고반점
글 : 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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